성별이분법의 강요, 각종 혐오가 보인다.
그래. 그럼에도 품고 가야 하는 건 안다.
그래서 그렇다. 품기 위해 비판의 글 올린다.
[1]
그를 사랑으로 품는 일과 그가 여전히 혐오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일은 서로 반대가 된다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가 지금 이해못하니 그의 혐오를 지적하는 일은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이고 순서가 있다고 말한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순서는 없다.
가장 친절한 건 그가 여전히 어떤 가해 속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그럼에도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당신이 서 있는 가해의 과정에도 함께 있겠다고 말해주는 것이 친절이다.
따로 분리한 그가 아니라, 연대된 우리로 서로를 품는 것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다.
[2]
동물권 운동도 많이 생각났다.
페미니즘에 남성의 역할도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 문제나 동물권 문제 같은 곳에서는 가해의 주체로서 역할도 있다는 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자주 쓰는 비유가 유용할 것 같다.
"일본은 가해국가다"라는 말은 "일본은 적이다"라는 말과 다르다. 오히려 일본이 독일처럼 고백하는 것이 평화다.
마찬가지로 "남성은 가해자다"라는 말은 "남성은 적이다"는 말과 다르다. 마치 일본과 같이 남성들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다.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가해를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연대의 시작이다.
"일본은 가해국이 아니지만", "남성은 가해자가 아니지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일본도 모든 일본인이 잘못한 게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제를 반대하는 일본인도 있었음을 잊지 마라. 오히려 그런 일본인이라면 "일본은 가해국"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말한다. 마찬가지다. "남성이 가해자"라는 말을 곡해하게 하는 것이 차별주의임을 혼동해선 안된다.
불편해 한다고 혹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침묵하는 것이 진정 친절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제발, 그가 모른다고, 그가 불편해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배려고 포용이 아니다.
가해자가 함께 하려고 할때는 가해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가해인지 알려주고 함께 극복해 갈 수 있다.
[3]
그리고 또한 꼭 잊지말아야 하는 우선순위를 말하고 싶다.
그 혐오도 품고 가야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에겐, 그런 품음도 없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험의 경계에 있는 이들은 걱정을 받는다. 그러나 경계도 아닌 아예 위험 한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은 오히려 더 밀려난다.
더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는 이들이, 연대의 힘으로 나눈다. 그것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없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가?
그래. 어쩌면 경계선 상에서 고민하는 그가 더 효과적인 도구로 보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사람이 있기에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아직 여전히 드러나는 성별이분법과 혐오에 분노하는 사람을 보면 걱정하지 말아라. 서로 안아주어라. 당장 분노하는 그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지만 걱정없다.
한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연대가 하는 일이다. 사랑이 하는 일이다.
더 가진 것 없는 이들, 더 비존재화된 존재들의 연대, 그 눈물과 아픔에 동참하는 일이 언제나 모든 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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