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약자라서 도와주는 것과, 여성이 "약자라서" 연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가해자들이 편하게 받아들이는 말은 열심히 고민하면서, 피해자들이 편하게 받아들이는 말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을 표현하길, 도와주려는 사람도 쳐내는 이분법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이라 말하며, 자기가 만들려는 진정한 평화를 주장합니다.
아니요. 가해자가 편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이득을 얻는 게 편해지면 홀로코스트까지 가는 존재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그냥 위계적인 이득을 포기하지 않고 시혜적으로 도와주는 만족감을 얻으려 했을 뿐입니다.

여자들을 앞에 세워놓고 그 자위행위를 즐기려다 실패한 것 뿐입니다.

피해자들의 연대의 목소리가 커졌을 때에야 들을 귀가 조금 열렸습니다. 권력이 듣기 편하면 그냥 자기 편한 생각을 합니다. 가해자는 이미 피해자를 이해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권력입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있을 때, 진실은 언제나 불편합니다.
권력은 억압에 대한 해방을 단순히 권력 투쟁을 위한 힘싸움과 뒤섞을 수 있고, 가해 때문에 터져나오는 비명을 단순한 욕설과 뒤섞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약자들의 연대는 가해자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화를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단지 가해자들은 불편하지 않았을 뿐이고, 불편할 만한 얘기는 공격과 욕설로 뒤섞었을 뿐입니다.

가해를 배제하는 곳에서 가해자도 인간으로 연대됩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남자도 약자라며 성별간의 힘싸움으로 만듭니다. 이미 위계적 이분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약자들과 연대하고 편을 가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전자의 사람들은, 자기는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공격을 받았다고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한 것은 공격이나 배제가 아닙니다. 가해 권력이 배제로 보게 할 뿐입니다.
이분법이 있다면 전자인 가해 권력과 후자인 피해 연대의 선택입니다.
가해자라도 전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피해자가 나중이 되지 않을때에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가해자가 편하게 듣는 목소리가 아니라,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일이 편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해주는 게 아닙니다. 10개를 빼앗던 것을 5개만 빼앗도록 된 게 평화가 아닙니다.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힘싸움 같은 것이 아닙니다.
10개 빼앗던 것을 5개만 빼앗게 된 것도 가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면 안되는 연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연대를 배타적인 이분법적 존재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가해 권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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