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없음을 문제시 하는 태도를 보며 ‘사람의 죽음 앞에 다소 과격한 건 아닌가’란 생각이 없진 않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른 가치들이 이야기 될 때, 나만의 가치관이 아니라 마음 속 대화의 광장으로 들어가 본다.
이번에는 고인의 문제다. 고인의 명예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을 함께 공유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유1] 어느 공직자가 거대 기업과 연결되어 횡령과 배임을 저질렀다가 이것이 고발되었을 때, 자살이 일어난 사건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1) 그의 죽음이 있으니 비리에 대한 수사를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떤 비리를 저질렀고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는지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 앞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그래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확실한 조사와 발표는 오히려 그의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2) 그 공직자 역시 그의 비리 때문에 자살한 것이라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리와 자살을 연결시키는 것이 고인에 대한 무례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성폭행 문제에서 만큼은 그 문제 때문에 자살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고인 앞에 말을 조심하라는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무언가 회피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100퍼센트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건 발생과 자살의 예방으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비유2] 모범생으로 알려졌던 대기업 재벌 3세 학생회장이, 회사 직원의 자녀를 왕따 시켰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사건을 밝혔는데, 재벌 3세 학생회장이 자살했다고 생각해보자.
(1) 우리는 피해학생의 고발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가 자살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엘리트주의, 차별의 구조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자살을 의미 없게 만들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원인들을 제대로 직면하고 해결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성폭력의 문제에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이 비극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다.
(2) 우리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수치스런 피해 행위의 목록을 포르노처럼 구경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는 고인의 명예 때문이 아니다. 피해자가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 가해자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가해자의 명예를 세워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해자의 가해 구조를 이어가는 것을 통해 가해자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다.
(3) 그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구조에서 악행을 저질렀다. 그 악행을 다루는 것은 고인에 대한 무례가 아니다. 오히려 악행을 덮는 것이 고인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하는 원인이었다. 고인의 가족들 역시 피해자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가해자의 명예를 그나마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유족들에 대해서는 잠시 시간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유족과 피해자 간의 관계에서 유족들이 권력을 갖게 되지 않는데 있다. 유독 성폭력 문제에서만큼은 유족들에게 그런 권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구조가 있다.
[비유3]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은 친절하고 자애롭게 조선인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동등하다는 저항은 언제나 폭력적인 것이 되었다. 흑인과 백인이 같은 음수대를 사용할 수 있고, 같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폭력이었다.
(1)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은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비방이 아니다. 오히려 가해자가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함께 해결하는 과정이다. 가해자 개인이 아닌 가해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향한다. 그러나 그 구조에 대한 지적은 결국 가해의 원인을 제공한 개인으로 말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으로 말하고 있지만, 직접 강제점령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방관하고 있던 일본인과 그 후손들은 당연히 억압당한 조선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한다.
(2) 피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과격하고 무례하다고 말한다. 물론 과격하고 무례한 사람이 없진 않겠으나, 마찬가지로 가해의 위치에 있는 사람과 그 구조가 더욱 과격하고 무례하다. 구조가 차별적이니 가해의 위치에서는 겸손하게 차별할 수 있다. 사람들의 태도만 따지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겸손하고 이성적인데, 조선인들은 천박하고 감상적이다. 정말 동등한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태도의 차이야 말로 차별의 반증이다. 가해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피해자에게 태도를 수정한다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 말한다. 피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도 상황을 좋게 만들진 못함을 인생을 통해 경험했다. 차별이 극복되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 피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 선후 관계를 뒤섞는 것이 성폭력 문제에서는 쉽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비극들의 진짜 원인이다.
이렇게 길게 설명하면 너무 장황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짧게 말하면 이해가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무 과격하다고 말한다.
바로 그것이 일본인이 사과를 요청하는 한국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바로 그것이 구조의 문제다.
이번 성추행 고발에 있어서, 경찰 관계자는 “서울청에 고소장이 접수된 것은 사실이나 세부적 사안에 대해서는 고인의 명예가 있어 확인해주기 어렵다”고 밝혔다고 한다. 바로 이 구조가 이런 비극의 원인이다.
고인에 대한 예의는 피해자가 나중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우선시 되는 것이야말로 고인에 대한 예의다.
#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고인에 대한 예의는 피해자가 나중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고인이 추구했던 가치를 훼손한다. 피해자가 나중이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고인에 대한 예의다.
약자들이 소외되는 그 구조와 가해가 죽음을 만들어낸 원인이다. 피해가 원인이 아니다. 이를 뒤섞는 일이야 말로 고인에 대한 무례다.
고인의 죽음이 의미없지 않게 만드는 일은 그 가해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더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나는 개신교인이지만 "자살도 살인이니 지옥에 간다"는 식의 믿음을 갖지 않는다.
다만 부활의 추모를 믿는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결국 가부장제이며, 가부장제는 죽음을 이용하여 다시 억누르려 한다.
이들이 숭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 죽음이다.
그러나 죄악을 직시하는 추모는, 그의 죽음을 다시 억눌린 이들의 연대로 살려낸다.
이제 믿는 것은 생명이다.
#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댓글로 썼던 내용 옮깁니다)
1) 죽음을 이용해 2차 피해를 가하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고인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는 모든 경우에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 예의, 기계적 사랑은 또 다른 기만이자 폭력일 수 있습니다.
죽음이 왜곡된다면 바로 위치하도록 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2) 당분간 시간을 갖자는 것은 모든 일에서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참사로 사람들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참사를 조사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3) 그렇다고 할 때,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죽었다고, 참사의 생존 피해자들(그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의 삶이 억눌리고, 누군가는 다시 죽어나가는)의 탓이 되는 구조가 있다면 더욱 침묵해서는 안될 일일 수 있습니다.
4) 구조의 문제는 접근법이 다릅니다. 실제 가해자인 일본인이 대다수 죽었으며 얼마 있지도 않은데, 현재 모든 일본인이 우파도 아닌데, 우리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조적 가해자와 구조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5) 추모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바로 잡기 위한 추모의 방식도 존재합니다. 참사의 가해자가 죽었을 때, 함께 그러한 참사의 원인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6) 가장 고통 속에 있는 것은 유족들만이 아닙니다. 피해자 역시 정신병원에 다닐 정도의 억눌림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 서 말했듯 죽음의 원인은 피해자 탓이 아닙니다. 구조적 상황 속에서 죽음을 위로하는 일은 그 구조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로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 지는 모든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저 기계적으로 당분간 시간을 갖자는 말만 할 수 있다면, 그건 구조의 문제에 있어서 다른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참사의 비극을 제대로 본다면, 나중으로 미루자, 언제까지 그럴꺼냐 말할 수 없습니다.
7) 이런 구조 속에서 기계적 적용만 하는 건 가해에 대한 침묵으로 작용합니다.
단서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 2차 가해를 막는다면, 죽음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기계적 사랑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구체적, 상황적 입니다.
#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학살과 수탈에 가담했던 친일파가, 해방을 맞아 자살했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빼앗긴 이들 탓이 아니라 그의 수탈 탓이다.
수탈 당하던 이들이, 그 가족들이, 조문을 하지 않으면 괴물인가?
그의 죽음 앞에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그의 수탈)을 덮자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살과 수탈은 지금도 여전히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학살과 수탈이 정상이고, 그것은 개인의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용인되는 곳에서 그런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건 자연스럽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피해의 연대와 완전히 분리된 특정 피해만의 연대는 가능하지 않다.
반대로 학살과 수탈을 함께 바라본다면, 특정 피해에 대한 연대는 언제나 동시에 함께 강력해진다.
#피해자와_연대합니다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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