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편 19:5-6)

예전에는 성경이 과학을 증명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천동설은 명확했으며 의심의 여지란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성경 구절이 천동설을 증명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마치 위의 성경 구절처럼 해가 뜬다, 해가 진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천동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성경을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처럼, 사회·문화의 회복에 따라서도 성경의 이해는 달라졌습니다. 성경은 노예와 여성 차별이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던 주장들도, 사회·문화가 건강하게 회복되면서 반박 되었으며, 원래 성경이 말하고자 했던 바에 대한 좀 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졌지요.

이 시대는 성소수자에 대한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한 주장들도 활발히 제기되고 있지요. 이러한 시대 속에서, 성경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밝혀진 사실과 성경과 동성애의 관계를 다루고자 합니다. 이를 전개하기 위해 성경의 해석에 대해 이글이 갖고 있는 입장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사람의 뜻대로 해석하면 안되며 성경에서는 명백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제시되었던 많은 주장들이, 사실은 사람들이 자기 느낌으로 읽고, 자기본위로 편집하고 골라낸 결과물들인 경우도 많았지요. ‘문자 그대로’라고 주장 하지만 오히려 성경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은 그의 주장을 위한 도구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려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그 사회나 사람들과 독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재해석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재해석의 도구들이 그저 자기주장을 위해 선택되어진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때에도 마찬가지로 성경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장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성경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더 많은 지혜와 함께 건강해진 사회에서는 성경의 온전한 의미가 좀 더 선명히 드러나곤 했습니다. 사람의 자기 본위가 아닌 성경이 주체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때 입니다. 앞으로 진행될 글 또한 성경은 성경 자체로 주체라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천동설의 시대와 지동설의 시대처럼, 시대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나 판단력에 따라 성경이 좌우된다는 견해는 이 글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에서도 동일한 빛을 비춥니다. 인간은 그 시대에 허락된 만큼만 성경을 알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어느 시대건 어떻게 해석되건 성경이 비추는 빛의 정도는 동일합니다. 성경은 스스로 온전하며, 그 자체로 주체이기 때문입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대에 주어지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에 맞춰 성경의 온전함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 받는 것입니다. 성경의 온전한 의미를 안다는 것은, 사람이 성경과, 시대 속에서 허락된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입니다.

천동설의 시대에서 성경적 창조 질서가 천동설이라고 했던 것이 성경을 잘못 읽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류에게 주어진 지혜 앞에서,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천동설을 성경을 이용해 고집하였을 때, 성경은 주체가 아닌 단순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실현하자며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자행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내세워 뻔하게 사람을 죽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구원이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런 시대가 있는 것은, 성경의 빛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본위로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본다고 하지만, 그것을 보는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고 성경은 단순히 도구가 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꾸란을 받아들인다는 IS가 그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성서가 주체가 아니라, 자기본위로 성서를 대합니다. 성서가 비추는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읽고 있다는 자신의 판단력을 빛으로 삼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빛을 거절하는 만큼, 성경은 더 많은 죄악을 만들어 내는 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성경에 온전히 반응한다는 것은 결코 그 문화권의 지배적인 사조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 시대에 주어지고 있는 지혜들을 받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밝혀지고 있는 오해들]

인권에 대한 이해와 과학의 발전 등은 동성애에 대한 진실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여러 성소수자 중 하나의 부류 입니다. 일부 기독교에서는 성소수자의 문제 또는 시민으로서 인권의 문제를 동성애로 싸잡아서 다루곤 하는데, 이는 마치 미국 원주민들의 문제나 유태인 학살, 우리나라에서 일제강점하에 이뤄진 차별과 유린을 모두 그냥 흑인 문제 중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맞지 않는 논리라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취급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무례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전반적인 성소수자가 아닌 동성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남성 간의 성관계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동성애가 타겟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글의 목적이 성경과의 비교이기 때문에, 중심적으로 동성애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현대의 의학과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동성애가 특별히 도덕적 문란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결국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자연 속에서 꾸준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인간과 유사한 원숭이에서 뿐 아니라, 조류나 곤충에 이르기까지 성을 가진 동물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물론 그 원인은 종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동성애는 단순히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는 곧 어떤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 걸 뜻합니다. 아무리 성적 문란의 시대라고 해도 동성애의 유전적 확률이 증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적으로 보수적인 시대라고 해도 그 유전적 확률이 줄어들진 않습니다. 단지 이성애가 문란한 사회라면 동상애도 문란할 뿐인 것입니다.

유전과 관련된 오해들은 꾸준히 제기됩니다. 동성애자는 아이를 갖지 못하니까 만약 동성애의 유전자가 있더라도 결국엔 사라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동성애에 관련된 유전자는 밝혀진 것이 없으니 유전적 요소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격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혹은 생리해부학적 요소들은 매우 일부분이 밝혀지긴 했으나, 거의 대부분은 밝혀지지 못한 상황입니다. 밝히지 못했으니 성격은 유전자와 전혀 상관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죠.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성격이 있고, 그들의 성격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동물들의 동성애가 부모로부터 이어지거나 동료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성애가 고쳐졌다는 사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가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례가 무엇인지는 성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알게 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성소수자 중 하나인 것처럼, 동성애자 안에서도 다양한 분류가 있습니다. 성적 끌림을 느끼는 정도가 일반적인 경우도 있고, 없거나 희미하게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성애자나 반무성애자의 특성에 가까운 동성애자들이 있습니다. 동성애를 하던 사람 중에서도 무리 없이 이성과의 결혼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는데, 양성애자라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양성애자라고해서 남성과 여성에 똑같이 끌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쪽 성에 대해서는 그 끌림이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노력한다고 양성애자가 되거나 무성애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성애자가 노력한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애초부터 양성애자고 애초부터 무성애자 입니다. 이성애가 조절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조절이 가능하게 태어난 이성애자도 있으며 그런 사람이 조절 가능합니다. 그렇게 조절 가능하다고해서 이성애가 고쳐질 수 있고,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만 성지향이나 성정체성은 유전자에 의한 영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 또한 받게 됩니다. 동성애에 대한 성지향에 대해서 주위의 억압 때문에 원래 그의 자연스러운 성지향이 억압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와는 좀 다른 경우로서 단순히 참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때는 본인의 성지향을 비밀로 할 수도 있겠지요. 고연령자들의 동성애 비율이 낮은 것을 보면, 사회적 억압에 의한 성정체성의 억압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더 배타적인 환경에 있었던 예전 시대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차별 속에 정체성이 억압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날때부터 환경에 따라 억압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거고, 어떻게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똑같이 겪었더라도, 그 사건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영향이 크더라도 정체성의 억압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연히 애초에 사람에 따라 다르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을 받아 변하는 사람이 있다고, 모두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를 동성 간에 성관계를 갖는 사람으로 규정하기에도 모호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회색 로멘틱이라는 분류에서는 성적인 끌림이 아닌 정신적인 끌림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이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동성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끌림을 느끼는 성과 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성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남녀의 육체 관계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신적인 사랑은 동성에게만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편 육체의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남자인데, 동성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남자로서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인데, 드러나는 육체로는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처럼 보일 뿐이죠.

이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동성애적 기질이 100%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성애자 사이에서 그것이 전혀 작동할지 않을 정도로 이성애적 기질이 월등하게 강할 뿐입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에게 어떻게 동성애적 기질이 있을 수 있는지 자체를 납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격이 제각각이듯 이성애적 기질과 동성애적 기질의 비율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이성애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긴해도, 동성애적 성향 역시도 어느 정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동성애자가 되고 싶어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성애자가 되고 싶어서 이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편견과 차별 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이성애자인 내가 동성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안되는 일이란 걸 본능적으로 압니다. 동성애자의 경우 어렸을 때의 폭행이나 정신적 충격이 발견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를 보고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성애자의 사례에서도 어렸을 때의 성폭행으로 성적으로 과도하게 개방적이 되거나 매우 폐쇄적이 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출생 이후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후천적 요소에 영향을 받으니, 이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닌 배울 수 있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도 동일합니다.

마치 천동설의 시대에 모든 과학적 증거는 천동설에 끼워맞춰진 것 처럼, 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에는 과학과 논리가 동성애는 후천적인 것이라는 가정에 끼워맞춰졌었습니다. 그러나 천동설의 예외 사례가 축적되고 지동설의 시대가 왔던 것처럼, 동성애가 후천적인 것이라는 가정의 예외 사례가 이제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시대가 왔습니다. 천동설의 시절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이 창조질서를 어지렵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동성애에 관련된 사례들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동성애는 창조질서가 아니니 고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남색을 죄라고 합니다. 따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지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타락 때문에 동성애가 나타났다는 개념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세상의 타락 때문에 각 나라의 언어가 나뉘어졌다는 개념과 그다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타락 때문에 동성애가 나타났다는 개념이 있어도, 동성애자의 존재 자체가 타락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이는 타락 때문에 언어가 나뉘어졌다는 개념이 있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각 나라 별로 언어가 나눠져 있는 것이 타락의 증거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세상의 타락 때문에 사막이 생겼다고 해봅시다. 사막에서 사는 것에 불편이 있는 것이지 사막이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선천적으로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그가 죄인인 것도 그가 타락한 것도 아닙니다.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면 그 자체로서 건강한 것입니다. 

[성경 시대에 나타나는 남색과 현대의 동성애]

이번에는 성경이 쓰여졌던 시대에 나타났던 남색과 현 시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동성애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고대 중동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안에서, 여성 간의 성관계는 존재하지도 않거나 매우 천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 남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애보다도 오히려 더 정신적인 것이며, 우월한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관계를 갖는 이들이 서로를 책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정은 여성과 꾸리고 그것과 별도로 갖는 행위였지요. 

이미 남색이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중심적 단어입니다. 남색이란 것이 남자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만, 여색이란 것이 여성간의 성관계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남성만을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는 성관계를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으로 여성은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말해 여성 간 성관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성관계는 남자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성관계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고려되지 않을 때, 성관계는 가정을 이루는 것과 상관없어졌습니다.

주체와 주체의 관계인 남성 간의 성관계는 특별한 위치에 있기도 했으며, 제의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고대 시대에서 제사 의식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제사 의식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성관계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동성과 관계를 갖는 제사 의식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계는 단순히 쾌락이나 부부관계라는 차원이 아니라 신비하고 신성한 의식의 영역이었지요. 물론 그것은 다른 부족이나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반대의 터부시 되는 행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동성애는 그러한 남성 간의 성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상대에 대한 유대감과 책임감 입니다. 이는 이성애자들이 배우자에 대해서 갖는 감정과 동일합니다. 성적 지향이 동성일 뿐입니다.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관계는 깊은 책임감과 유대감 안에서 이뤄지고, 정신적인 관계는 더 깊어집니다.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책임감과 유대감 없이 관계를 갖는 사람은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문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동성애자들은 쾌락을 위해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동성애는 앞서 말한 고대 시대에 나타나는 관계보다는, 오히려 불임 부부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불임 부부가 정신적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더 깊이 있는 관계가 되고, 또한 둘의 사랑을 배경으로 아이를 입양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들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정자와 정자가 만나서 또는 난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죠. 그러나 동성애자들의 관계는 그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불임 부부가 그들의 성관계를 통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육체적 교감은 유대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동성애는 절대 정자와 정자가 만나게 하기 위해, 난자와 난자가 만나게 하기 위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성지향에 따라 상대가 동성일 뿐 이성애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기반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과 사랑까지 갖습니다. 동성애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 부부의 아이라고 해서 아이가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성애자를 기준으로 동성애를 측정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고 이상한 일입니다. 성적 지향이 이성인지 동성인지가 다를 뿐, 성과 관련된 문제, 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성지향이 다르니 다르게 분류하는 건 차별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이성애에 비추어 비교하는 것은 차별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비춰서 이성애자도 똑같다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쉽게 극복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고 있습니다. 단순합니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단지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차별의 사회가 걷어진다면 충분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남색과 동성애의 비교]

이제 성경에 등장하는 남색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서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리긴 했지만, 성경에는 명백하게 남색은 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작업은 성경에 등장하는 남색과 현재의 동성애를 비교해 보고자 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동성애라고 하는 표현은 성경 시대에 나타나는 남성 간의 성관계가 아닌, 현대에서 이해하게 된 동성애를 뜻합니다. 또한 여기서는 이해를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장치로, 전통적인 가족구조인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구조를 기준으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인 자와, 어머니를 죽인 자와, 남을 죽이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디모데전서 1:9-10)

우리는 앞서 성경 시대의 남색과 동성애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동성애에서도 동성 간의 성관계가 있지만 이는 깊은 유대감과 책임감을 기반으로 하며 건강한 부부 생활을 이루고, 아이를 키웁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의 남색은 이런 동성애와 달리 책임이 없으며 부부관계나 육아와도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남성 간 성관계가 존재했던 것이지 현대의 동성애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위의 남색이 그 시대의 남색 만을 말한 것일 수도 있고, 현대의 동성애 까지 포함하는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구절만으로는 남색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준해서 그 판단을 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거부감이나 단순히 그 사회의 일반적인 견해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문화 또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시민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한 선별적인 해석을 하는 것도, 성경을 주체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본문만으로는 남색이라는 단어가 동성애까지 함께 말하는 것인지, 남창 만을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의 주관이나 해석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성경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도구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체입니다. 신자들은 그 시대에 허락된 지혜를 받고, 성경이 비추고자 하는 빛을 전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남창은 몸을 파는 사람입니다.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동성애범죄자(homosexual offenders)를 뜻하는데, 이것이 동성에게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문맥상으로는 돈을 주고 남창과 관계를 갖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는 물론 동성 간의 성관계 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와 동성 간의 성관계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는 배우자와의 깊은 유대감으로 성관계를 갖습니다. 이성애자도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배우자와의 깊은 유대감으로 성관계를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애자 중에서도 간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간음이 이성애와 동일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1:26-27)

위의 본문만 떼어 놓고 보았을 때는, 죄된 정욕의 결과가 동성 간 성관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와 같은 번역을 보면서 이러한 결론을 얻는 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만 떼어 놓고 보는 게 아니라, 이외에도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정욕을 지적하는 구절들을 고려해 보자면, 정욕에 의한 죄의 결과는 동성애 자체를 말하기 보다는 문란한 성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책임감과 유대감에 근거하는 바른 성관계를 버리고, 그에 반하는 정욕에 근거하는 성관계를 갖습니다. 남자들도 그러하죠. 또한 남성우월주의의 사회 속에서 정욕을 위해 행해지는 남성 간 성관계 또한 그러합니다. 성경에서 정욕을 다루는 좀 더 일반적인 맥락은 이런 관점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러한 맥락만으로, "해당본문이 동성 간 성관계가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주어지는 지식들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가 읽은 '문자 그대로'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차별을 걷어내고 동성애에 대해 밝혀진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동성애는 결코 정욕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성지향 입니다. 이들의 성관계는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부 간에 이뤄지는 것과 같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유대감 입니다. 이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형성하고, 바로 그 건강한 관계 안에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그것이 동성애에서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성이 너무나 쉽게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바른 관계가 아닌 정욕에 근거한 관계를 갖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동성 간에서도 욕정에 의한 관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남색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관계 말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남색과 동성애의 비교]

사실, 구약에 있어서는 동성애라는 틀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나타납니다. 위의 사례도 그러합니다. 이성애자처럼 동성애자도 끌림을 느끼는 성이 정해져 있습니다. 남자 이성애자가 홧김에 남자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관계를 맺겠다면서 첩을 윤간하는 맥락은 쉬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양성애자 불량배 무리라고 한다면, 왜 굳이 남자를 내놓으라고 했던 것일까요.

그 시대에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서는 남성은 주체이며 여성은 물질화 되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여성 사사가 있던 만큼, 여성의 물질화를 반대했을 것입니다. 성관계는 건강한 가정을 형성하기 위한 것으로 책임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음, 제사의식, 남색에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견해는 주변 국과 부딪히게 됩니다. 노인은 처녀인 딸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처녀라는 것은 부부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사람 이란 것을 말합니다. 부부의 관계를 맺고서도 거절하는 건, 딸과 성관계를 가진 사람의 죄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실제 딸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진짜 딸을 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부부 관계를 맺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표현한 것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성우월주의를 가진 이들이라면 남색을 거부하고, 여성을 물질화 하지 않는 이들의 가치관에 대해 대적하고자 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적대와 폭력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내가 주체가 돼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본문의 불량배들은 단순히 정욕에 의한 성관계가 목적이 아닐 꺼라는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그 시절과 달리 정상적인 동성애에서의 성관계는 부부 관계의 측면이라는 것도 좀 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레위기는 이방 풍습을 따르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남자 간의 관계와 관련된 언급이자녀를 불태워 신에게 바치는 것, 남자 간 성행위, 수간 등 당시 가나안 사람들의 제사 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등장하며, 본문에서 ‘망측한 짓'에 해당하는 ‘토에바( תּועבה, 역겨운 것)’가 종교적인 영역에서 쓰이는 언어임을 들면서, 이는 동성애가 아닌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것이 단지 우상숭배만을 뜻한다고 하기에도 다소 논리적인 비약이 있습니다. 

레위기만의 특별한 관점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남색이나 혹은 범죄적 행위를 말했다면, 본문서는 남성 간 성행위 자체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남색을 지적하는 것과 분명 다른 관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레위기에서는 돼지고기 같이 먹으면 죄가 되는 규례 등 신약 이후에는 폐지된 규례가 있으며, 따라서 남자 간 성관계에 대한 규례도 폐지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폐지된 규례라는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례들과 현대의 동성애를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남자 간 성행위가 등장하는 부분의 앞쪽으로는 여자와의 성관계에 대한 목록들이 나오는 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근친 간의 성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아버지의 다른 아내나 이웃의 아내에 대한 성관계도 추가되며, 종합적으로는 사회관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 탐욕을 근간으로 자행되는 행위를 포함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법도에 어긋나는 일들입니다. 현대의 동성애와 달리 그 시대 남자 간의 성관계는 책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사회관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에 대한 책임도 질 일이 없었으며, 남자 간의 관계는 오히려 탐욕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이라고 포장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동성애에서는 동성과의 성관계가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성애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사회관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성행위에 대해 경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탐욕을 근간으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근간으로 합니다.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성지향입니다. 당연히 법도를 어긋나는 성관계를 지탄합니다.

동성애는 이상행동도 아니며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는 이전 사회에서 존재했던 법도에 어긋나는 관계에 가려졌던 건강한 관계입니다. 그동안 동성애에 대한 편견들이 있었으나, 차별을 걷어내면서 그 진실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남성우월과, 노예제도도 문자 그대로 쓰여진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걷어내자, 성경이 주체가 되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바로 성경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이 해석하는 문자그대로가 아닌, 차별이 걷어지는 그곳에서 성경이 주체가 되어 이뤄집니다. 

성경이 법도에 어긋난 것으로 지적한 것이, 당시의 남색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정상적인 동성애까지 포함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온전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에 대한 깊은 고민 전에 직관이 작용합니다.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로써 천동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천동설을 주장했던 시절에도 사실 직접적으로 천동설을 표현하는 듯한 구절도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직관적으로 해가 뜨고 해가 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한 구절에서는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나와있었지요. 그러나 성경은 천동설을 얘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세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역겨운 것(토에바)'이라고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역겨운 느낌을 갖는 것'과 '법도에 어긋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남성 이성애자들이 남자 간의 관계 심지어는 성관계도 아닌 손을 잡는 연애관계 만으로도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성경에서 말하는 ‘토에바’와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동성애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신이 사람에게 그러한 거부감을 느끼도록 지으신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며, 본문의 사례가 동성애가 아닌 우상숭배를 말한다고 하는 주장보다도 훨씬 비약이 심한 것입니다. 남성 간의 관계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의 계시가 아니라, 단순히 성지향에 따른 자연스런 반응이고, 다양한 성정체성 중 하나라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서는 정상적인 동성애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색이나 종교의식과 같은 것들이 있었지요. 나의 직관이 언제나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명확하게 무엇이라 말한다고 판단했던 근거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성경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말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올바른 관계보다도 개인의 직관이 근거가 되었을 때, '성경은 명확하게 학살을 명령하고 있다', '차별이 성경적인 것이다'고 왜곡되어 왔습니다. 반면 그 시대에 주어진 지혜와 함께 했을 때, 그때에 성경이 비추고자 했던 빛이 드러났습니다.

창세기에서도 사사기와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온 남성과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롯은 이에 대해 악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처녀인 딸들을 준다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의 맥락일 수 있고, 마찬가지로 실제 딸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사기와는 또 다른 난해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모든 남자'라는 표현입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마을의 모든 남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당한 무리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수준에서는 단순히 동성애를 넘어 남색의 틀에서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규모인데 단순히 윤간과 같은 폭행 정도로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무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동성애의 관계]

성경에서 등장하는 남색은 죄로 분류됩니다. 동성애는 그러한 남색과는 다른 특성을 보이며, 현대의 동성애에서도 성경에 등장하는 남색과 같은 경우는 당연하게도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남색이 아닌 동성애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가 아닌 우상숭배의 제사의식이나 고대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색을 대표적으로 표현했을 뿐 동성애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되는 남색과 현대의 동성애를 같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성 관계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고, 상대를 물질화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이성 간에서 죄이듯이 동성 간에서도 죄값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해석들도 결국에는 모두 사람의 해석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온전합니다. 성경은 그 자신이 주체입니다. 사람의 해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은 시대에 허용된 지혜를 받아서, 거기에 반응하며, 성경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내 주장이 어떻다는 것을 논리로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본 성경으로 내가 믿는 것을 주장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 주장일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살립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심지어는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한다"는 말 그대로를 전달하더라도, 오히려 얘기를 듣는 동성애자가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의 해석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 자체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나오는 말이어서, 그를 참아내고 그를 살리려고 전했던 말인데, 동성애자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어리석고 죄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내가 성경대로 인내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 본위 대로 성경을 보고, 단지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성경을 읽는 자기 판단과 자기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듣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지, 아니면 성경과 온전한 관계에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주어진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아 오히려 내가 성경의 빛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이 사람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에 증명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를 믿기에 구별된 삶을 사람들을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불러준 것과 같습니다. 그저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성경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처럼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내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어쩌면 자기주장을 했던 것인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올바로 성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는 어쩌면 그리 구분하기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이뤄지는 세상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선포하고 있는데, 나와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의 내부의 결속력만 다지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타락한 세상의 핍박 속에서 정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내가 읽은 성경을 내가이용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선포하니 그 주변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단순히 불쌍한 사람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동일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고통으로 함께 마음이 찢어지는 것도 핵심적인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치유의 관계 안에서 그들 뿐만 아니라 바로 내가 회복 됩니다. 그렇게 서로 회복이 되어 갑니다. 그렇게 성경은 주체입니다. 성경은 빛입니다.

동성애 논란에서 진정한 핵심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잘 해석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세상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진정한 핵심은, 내가 정말 동성애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지, 나는 정말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지 입니다. 세상 권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가장 의미 없는 일입니다. 동성애자들의 고통에 침묵하며 살아가는 다수의 동의를 얻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게 똑같은 놈들이라는 취급을 받더라도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 바로 그 사람, 울분 속에서 힘든 삶을 사는 동성애자들,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고, 서로가 위로가 되고, 그것이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침묵하고 있던 다수에게 까지 영향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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