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명확한 규칙을 정하고 타협하지 않는 등 체계적인 육아로 유아들이 훌륭히 자란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 대표 육아방식인 치맛바람 등 체계 없는 모자란 훈육은, 모자란 인간성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모자란 나라, 모자란 국민성을 만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거대로 우리 아닌가?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프랑스의 방식이 더 합리적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기에 더 많은 폐해들이 되물림되고 있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열등한 한국 문화니까 우아한 상류층 서양 문화로 창씨개명돼야 하는 건가?
이땅 자연과의 관계, 유구한 동양 역사 속의 한반도에서 우리가 왜 그런 우리가 되었는지를 그렇게 쉽게 판결해 낼 수 있다는 것인가?
아이에게 휘둘리는, 아니 아이와 분리되지 못하여 서로의 인생을 망치게 하는 뭔가가 있긴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의 회복, 공동체성의 회복과 함께, 육아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는 모른다. 서양의 구조와 동양의 구조는 다르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정말 먼저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보다 부부가 서로 얼마나 좋은 관계에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한국 다운 건강한 공동체로 있을 것인가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 후에는 자연스레 프랑스 방식처럼 될 수도 있고, 아님 또 다른 한국식 어떤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
부모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유아 때부터 마을 어른들을 접하고, 마을 형들과 어울리며 배우는 무언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왜 또 단지 내 아이를 볼 뿐인가. 왜 또 우리들의 아이를 보지 않고, 왜 또 우리를 보지 않는가.
내 육아가 내 아이를 바꾸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회복이 아이들의 회복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로서 건강한 우리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건강성을 회복하는 걸 또 다시 미래세대에게 떠밀지 말자.
우리가 책임지고 회복되면, 회복된 만큼이 자연스레 미래세대로 흘러갈 것이다.
어른이 먼저 책임지자. 우리가 먼저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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