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곳으로 처넣어놓고는 오히려 왜 그렇게 됐냐며 비난하고 조롱한다.
회사라는 건 실체가 없으며 실제로 돈을 만드는 건 회사가 아니다. 돈은 오로지 노동에서 나온다. 회사의 돈을 노동자에게 주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물어본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러나 서있는 장소가 다르니 무엇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단지 게으르고 이기적인 종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에 분노한다.
대답한다.
"빨갱이들을 척살해 정의를 세우자!"
(2)
사람들은 노예가 되어있다.
내면의 인간성은 억압되어 있다.
악한 개인만을 지적하고, 이해조차 못하는 그들의 기만을 지적한다.
그러나 단지 모두가 노예일 뿐이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이 정말 이해조차 못하겠는가? 아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이 타인에게 칼을 찔러 넣으면서 정말 그들 자신은 괜찮은가? 아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해 해버리는 것,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돌아 맞아 죽을 일이 되는 사회다. 그것이 노예의 사회다.
(3)
현실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하나. 강자가 되어, 두려움에 녹아드는 현실.
또 다른 하나. 약자와 하나 되어, 사람으로 해방되는 현실.
전자의 현실에선 사람과 싸우면 된다.
후자의 현실에선 사람을 괴물로 만드려고 하는 그 괴물 자체와 싸운다.
후자의 현실을 살아가면 전자의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차별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는다.
그럼에도 사람에게 돌려주어선 안된다. 거대한 괴물이 아닌 눈 앞의 사람과 싸우는 건 전자의 방식이다. 오로지 괴물에게만 돌려주어야 한다.
괴물만을 직시하고 괴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해를 드러내고, 두려움의 본질을 드러내며, 돌을 맞는 곳으로 함께 한다.
두드려 맞을 그 돌을 나눠지며, 이미 빈사 상태인 사람 대신 그 자리에 서준다.
그렇게 정확히 괴물에게 되돌려준다.
(4)
괴물과의 싸움은 육체이다.
정의를 알고 있으나 행동이 없는 건 전형적인 전자의 현실이다.
정의를 알지못하더라도 행동하고 있으면 후자의 현실에 있다.
전자의 현실을 살아고 있는 지 후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지는 너무나 쉽게 구분된다.
육체가 있는 자리가 점점 더 약자의 삶에 동참되고 있는가. 오직 그것.
인간은 개념이 아니다. 육체다.
그렇기에 이미 완벽하게 약자의 자리에 있는 것을 두고 완성이라 하지 않는다.
이제 시작한 육체운동 처럼, 꾸준하게 다가가고 있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이미 완성이다. 그 결과물을 꿈꾸며 한발한발 내딛는다.
전자의 현실은 개념의 현실이다. 등급을 나눈다. 사람은 등급으로 나눠진다.
후자의 현실은 육체의 현실이다. 이미 들어온 것 자체로 완성이다. 사람은 사람이다.
이미 사람이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어른에서 어르신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누려간다.
사람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곳으로 처넣어놓고는 오히려 왜 그렇게 됐냐며 비난하고 조롱한다.
회사라는 건 실체가 없으며 실제로 돈을 만드는 건 회사가 아니다. 돈은 오로지 노동에서 나온다. 회사의 돈을 노동자에게 주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물어본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러나 서있는 장소가 다르니 무엇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단지 게으르고 이기적인 종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에 분노한다.
대답한다.
"빨갱이들을 척살해 정의를 세우자!"
(2)
사람들은 노예가 되어있다.
내면의 인간성은 억압되어 있다.
악한 개인만을 지적하고, 이해조차 못하는 그들의 기만을 지적한다.
그러나 단지 모두가 노예일 뿐이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이 정말 이해조차 못하겠는가? 아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이 타인에게 칼을 찔러 넣으면서 정말 그들 자신은 괜찮은가? 아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해 해버리는 것,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돌아 맞아 죽을 일이 되는 사회다. 그것이 노예의 사회다.
(3)
현실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하나. 강자가 되어, 두려움에 녹아드는 현실.
또 다른 하나. 약자와 하나 되어, 사람으로 해방되는 현실.
전자의 현실에선 사람과 싸우면 된다.
후자의 현실에선 사람을 괴물로 만드려고 하는 그 괴물 자체와 싸운다.
후자의 현실을 살아가면 전자의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차별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는다.
그럼에도 사람에게 돌려주어선 안된다. 거대한 괴물이 아닌 눈 앞의 사람과 싸우는 건 전자의 방식이다. 오로지 괴물에게만 돌려주어야 한다.
괴물만을 직시하고 괴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해를 드러내고, 두려움의 본질을 드러내며, 돌을 맞는 곳으로 함께 한다.
두드려 맞을 그 돌을 나눠지며, 이미 빈사 상태인 사람 대신 그 자리에 서준다.
그렇게 정확히 괴물에게 되돌려준다.
(4)
괴물과의 싸움은 육체이다.
정의를 알고 있으나 행동이 없는 건 전형적인 전자의 현실이다.
정의를 알지못하더라도 행동하고 있으면 후자의 현실에 있다.
전자의 현실을 살아고 있는 지 후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지는 너무나 쉽게 구분된다.
육체가 있는 자리가 점점 더 약자의 삶에 동참되고 있는가. 오직 그것.
인간은 개념이 아니다. 육체다.
그렇기에 이미 완벽하게 약자의 자리에 있는 것을 두고 완성이라 하지 않는다.
이제 시작한 육체운동 처럼, 꾸준하게 다가가고 있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이미 완성이다. 그 결과물을 꿈꾸며 한발한발 내딛는다.
전자의 현실은 개념의 현실이다. 등급을 나눈다. 사람은 등급으로 나눠진다.
후자의 현실은 육체의 현실이다. 이미 들어온 것 자체로 완성이다. 사람은 사람이다.
이미 사람이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어른에서 어르신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누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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