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현재 62명의 부자들이 가진 부는 인류의 절반인 하위 36억 명의 것과 같다.

2010년 이후 5년 동안 62명의 부는 44%가 늘었으나 반대로 하위 절반 인류의 재산은 41%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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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위 62명이 하위 절반의 재산을 가져간 것 처럼 표현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하위 절반의 재산이 줄어든 것은, 가난한 나라의 인구, 원래 재산이 적은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

인구증가는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전체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하위 절반의 평균이 줄어드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상위 62명이 마치 하위 절반의 재산을 가져가고 있는 것 처럼 표현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위 62명이 하위 절반의 재산을 가져가고 있는 것은 맞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자연과 노동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에는 거짓이 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때, 진실한 구조라면 어떻겠는가.

노동량이 늘어 인류 전체의 부가 증가한다. 그러나 상위 62명의 노동량이 인구증가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겠는가.

비례적으로 상위 62명의 재산이 줄어들어야 정상이다. 무언가 거짓이 있는 것이다.

애초에 가난한 나라, 부자 개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연과 노동의 법칙을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약탈이다. 현대사회의 더 교묘하고 복잡하고 잔인하며 보이지 않는 약탈이 만연해 있을 뿐이다.


[3]

그렇다면, 공평과 평등이 답인가.

그것을 외친 것으로 보였던 사회주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놓고 계급을 만들었다.

인간이 공평과 평등을 이뤄낼 수 있다는 구호 자체가 인간에 대한 기만이다.

유사이래 인간이 불평등을 극복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불평등은 사회를 거대해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앞을 내다본다. 양극화와 환경오염의 시대에서 인간은 폭주하고 있는 이 문명을 컨트롤 할 수 없다. 모든 것의 붕괴가 다가온다. 마음은 아프나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노아의 방주는 동화 속 얘기일 뿐이다. 그날에 혹시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생존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악랄한 사람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공평과 평등을 포기한 적 없으며, 불평등에 굴복한 적 없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애초에 사회주의는 왜 등장했었는가.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왜 열광했었는가.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인간의 실패를 보고 한계를 마주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본주의가 그 안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품게된 것이었다.

어느 악랄한 사회 안에서도, 인간이 공평과 평등을 포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공평과 평등이 포기되었더라면, 불평등에 굴복했더라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애초에 도태되었을 종족이다.

인류의 덩치를 키운 건 불평등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를 지키는 것은 공평과 평등이다.


[5]

불평등은 생존불가능한 상태까지 인류를 멸종의 위기로 대려갈 것이다. 만약 살아남더라도 가장 악랄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장 악랄한 사람들은 사회구조적으로 악한 것이지, 유전자적으로도 더 악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만약 유전자까지도 불평등에 굴복하는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면, 어차피 그 사회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고 인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판단 역시도 사실 정확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억울한 내 감상에 근거하는 가정이다. 그냥 그들은 그렇게 악할 것이라고 내가 믿는 거다.

나는 다른 믿음을 가진다. 그 마지막 인류안에는 반드시 공평과 평등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사실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인간은 그러해 왔다.

사회가 붕괴되어, 인간이 인간으로만 설 수 밖에 없게 되는 그 날에는, 다시 인간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을 믿지 않고 공평과 평등을 추구하는 거 자체가 모순아닌가.


[6]

공평과 평등을 믿는다면, 불평등한 방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사람이 악하기에 혹은 어리석기에 강력한 통제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외치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자기 정의감에 의해 권력을 약탈하고 정의를 독점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불평등에 굴복한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고, 악한 이들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평과 평등을 포기하지 않을 뿐이다. 그 결과가 사회를 바꿔가고, 개인을 바꿔갈 것이다.

곧 나의 성과는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과는 오직 공평과 평등을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이다. 내 인생에서 사회구조는 바뀔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회는 내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공평과 평등이 바꿔갈 것이다.


[7]

지금의 사회가 폭주하고 있고, 인류가 그 마지막날을 향해 달리고 있더라도, 그러한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 오로지 공평과 평등이 지켜왔으며, 지켜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날 이후에는 또 다시 인류를 지켜갈 것이다.

내가 막 선하고 완전무결해서 불평등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인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공평과 평등에 반응해가며, 불평등에 저항해간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해본다. 간단하지 않은가. 그러한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이 나를 더 단련한다. 내가 완전무결하게 정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과정에 있기에 이미 그냥 인류일 뿐이다.

크게 또는 적게, 눈에 띄게 혹은 전혀 눈에 띄지 않게, 각 개인은 그 길 위에 있다. 마지막날을 맞이하고 있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과장되게 비장할 필요도 없다. 반드시라는 것도 없다. 나는 내 안의 공평과 평등을 누려간다. 내 정의로움으로 타인의 불평등 위에 서는 것이 아니다. 또다른 불평등의 방식이 아니라, 그저 타인의 공평과 평등에 반응해 간다. 그리하여 서로의 공평과 평등이 나눠지고, 꽃은 피어나, 또 흘러간다.

이미 이겼다. 언제나 이겨 왔으며, 지금도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걱정하지말고, 끊임없는 아픔과 눈물 속에서, 내가 누릴 것들을 누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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