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나누다 깨달았다.
나는 지금 쉼이 필요한 상황이고 쉬고 있다(심신이 무너져 그 신호로 약한 통풍이 왔고 무기력한 상황이다).
그런데 쉬고 있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용서하지 못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종류의 상황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가장 먼저는 난민들이 떠올랐다. 노숙인들도 떠오른다. 아마 갖혀 있는 동물들도 그런 류의 자기 파괴의 상황에 있을 것이다.

극복하라는 말이,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말이 독이 될때가 있다.
자기를 용서했다는 말로 빠져나오지만 다시 그대로의 세상에서 언제나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주어야 할 말은 스스로 용서하라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말을 건네야 할 것이다. 그 둘은 다르다.
다만 동시에 그 말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스스로 용서를 잘 할 수 있는 자기 자리를 정상성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용서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자리로 서로를 나누어 가는 과정이 정상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더 쉽게 괜찮아지는 환경을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더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나는 불안을 변명하며 무언가 쫓아갈 의미를 추구한다.
모두가 구원 받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자로 속여 불안을 벗어나려 한다.
그렇게 괜찮아지게 되어서 괜찮지 않아진다.

반면 비극을 향한 한 발짝은 겉으로는 나도 괜찮지 않아지는 것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건 괜찮지 않게 되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우리가 드디어 만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없다. 다만 드디어 우리가 만났다.
오직 거기서만 신기루 쫓듯 매달리게 되는 그 구원이 없어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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