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혐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믿고 있다. 차라리 혐오주의자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낫다.
당신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다. 그 현실이란 게 이미 약자들을 배제하고 만들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방치도 폭력이다. 혐오는 느낌이 아니라 바로 그런 폭력을 정당화해도 되는 구조를 말한다.
나도 성소수자 혐오자이며, 여성 혐오자이며, 인종 혐오자이며, 장애인 혐오자이며, 빈곤인 혐오자다.
다만 나는 성소수자와 여성과 장애인과 빈곤인과 분리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부모는 자기 아이 앞에 어떤 고통일 것인가. 나도 혐오가 점점 더 고통스러워져 갈 뿐이다.
'대승적 차원'은 전략적 선택일 수 없다. 그건 시혜적 위치가 좋다는 것이며, 단지 당신이 방관자의 위치일 수 있다는 뜻이다. 시혜는 또 다른 강화다. 방치란 곧 혐오에 힘이 더 해진다는 뜻이다.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거란 생각이 드는가? 그럼 당신이 혐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공격적인 것은, 이 말이 공격적이어서가 아니다. 이 말은 어떤 공격성도 없다. 당신의 전략적 태도 덕분에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지, 아니면 이 울부짖음 때문에 사회에 받아들여졌는지 살펴보면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은 오빠들만 추켜세워 줬을 뿐이다.
그냥 당신이 혐오주의자의 위치에 서 있는 거다. 차라리 남들 고통 위에서라도 당신 안위가 필요했다는 말을 해라. 그리고 그 말조차 약자들에게 비수를 꽂는 폭력임을 감당해라. 적어도 그 정도는 하는 게 사람새끼다.
우리가 여기에 있으며, 온건한 사람은 온건한 운동을 하고, 급진적 사람은 급진적 운동을 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안다.
기울어진 곳에서는 아픔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두어야 아픔이 해결 된다. 가시에 찔린 울부짖음이 있을 때, 울부짓지 말아야 사람들이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도움이 있어야 울부짖음이 해결된다.
같은 큰 소음이라고 해도 공장소음은 우리 심정에 꽂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울부짖음은 소리가 작아도 심장에 들어온다. 그런데 찔린 가시를 해결해 갈 때, 단지 그뿐만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여 나도 산다. 우리는 공동으로 살아난다.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듯 생명은 퍼져간다. 우리는 생명이다.
억울한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곳이 사람새끼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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