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써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렇기에 성소수자들이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판단하는 건 성경에 의거한 판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해가 움직인다는 구절만 있지, 지동설을 지지하는 어떤 구절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동설이 성경적인 판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성경의 표현과 공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개념적 의미의 여성과 남성의 존재가 현실적 존재들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들자면 수명이 긴 것이 복이라는 건, 생명에 대한 개념적인 의미죠.

그렇지만 애초에 수명이 다 다른데, 현실에서 수명이 길수록 더 정상적인 사람이고, 수명이 짧을수록  비정상적인 사람인가요?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그의 모습 그대로 온전합니다.


숫자는 다만 숫자이지 정상성의 기준이 아닙니다. 간성(인터섹스)과 빨강머리의 숫자는 비슷합니다. 그럼 빨강머리는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빨강머리는 정상적인 유전적 조합이고, 간성은 유전적인 이상으로 생겨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장애와 성소수자는 다른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다만 장애의 경계를 살펴보는 것은 정상성의 규정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합니다. 

비정상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도 장애입니다. 그리고 안경을 써야하는 나쁜 시력도 장애입니다. 이 경우에 누군가는 빨강머리 같은 단순 유전적 조합이 그 원인인 경우도 있지만, 누군가는 유전적 이상에 의해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장애가 정상성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굳이 유전적 조합에 의한 것인지 유전적 이상에 의한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곧 정상성을 규정하는 건 유전적 조합이냐, 유전적 이상이냐의 판단이 그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장애 자체가 비정상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자기 자신을 누리는데 불편이 없는 사회가 된다면, 예를들어 안경과 같이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사회라면, 비장애인으로 분류되고 인식됩니다.

성소수자의 삶이 불편한 건 혐오와 차별 빼고는 없습니다.

성소수자가 정상적으로 살기 어려워지는 건 혐오와 차별 빼고는 없습니다.

왼손잡이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문화적 판단이 있는 것처럼, 성소수자의 정상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사실이 아니라 문화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는 건 맞잖아?'라는 생각이 여전히 생각의 방향을 제한하게 됩니다.

네. 맞습니다. 그것을 아니라 한 적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간성으로 되어있기도 하고,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젠더 퀴어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 다른 존재가 배제되거나 비정상으로 규정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동물들도 동성 간 성행위 많이 하면서도 정자와 난자가 만나 번성하며, 동성 간 성행위는 무리사회에서 각각의 기작으로 그 사회를 지키며 번성을 돕습니다. 사자나 보노보 침펜지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을 애초부터 비정상성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이유를 발견해 갑니다.

양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수정되기 때문에 정상성이 규정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판단의 방향을 선택하게 하는 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들을 이야기해도 결국에는 '반대로 성소수자 옹호하기 위해 끼워맞추는 거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성애자인 여성이나 남성 이외의 존재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남장여자'와 같이 현재 사회에서 사용하는 빈약하고 제한된 표현보다, 더 풍성한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정상성의 규정은 그저 문화적인 것이지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곧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상성은 사실을 통해 규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문화적 요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관계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이성애중심주의' 같은 차별주의입니다. 이것이 판단의 방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천동설의 시대에 지동설은 창조주를 모욕하고 성경에 반하는 것이라 판단한 것처럼, 성경 자체가 아니라 차별주의가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중립으로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니라 차별주의가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동설의 증거들을 보고도 천동설을 무너뜨리지 않는 수학적 모델을 만드려고 했던 프톨레미오스처럼, 차별주의가 사실을 왜곡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서 판단하고 있나요?

예수님은 절름발이를 걷게 하셨습니다. 성소수자를 그런 카테고리로 넣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무엇이 성소수자를 동물에서도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나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와 권세를 얻고, 많은 자녀들을 낳는 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온전하다 하셨습니다. 혐오의 사회 속에서도 성소수자를 그 카테고리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당신은 혐오와 차별에 서서 판단하고 있나요? 아니면 복음 위에서 판단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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