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youtube.com/watch?v=p4EfijI5VXo&feature=youtu.be
이 영상을 처음 봤을 때 난 끔찍하다 생각했어.
애초에 강연자는 권력을 가진 위치이기에 저게 가능한 거고, 괴롭힘이란 건 그런 식으로 동화처럼 작동되지 않아.
자존감을 얻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또 다시 노력해서 자기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실행 못하는 진짜 자신은 초라하니까 버려두고는, 노력하고 실행하는 조작된 나를 대체하지. 내가 말하는 자기계발은 그런 거야.
그러나 여기서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당신은 다른 사람이 그런 자존감을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로 읽으면 어떨까?
왕따 당해봤어? 같이 왕따 되는 거야. 내가 자존감 잘 가져서 왕따를 피하는 게 아니라.
잘난 자리에서 조언해주는 게 아니라, 같은 옆자리로 가는 거지.
그게 진짜 자존감이야. 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이기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오히려 왕따 당하던 아이는 나를 괴롭히기 시작할 수 있어. 자신은 벗어나려는 행동이지.
하지만 어쩌면 정말 그 아이가 구원받고 회복될 수도 있어. 확률은 별로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일은 아니지.
바로 그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리로 들어가는 거야.
그 일은 영상처럼 고양감이 들지 않겠지.
그게 진짜야. 우리는 할 수 없어.
그런데 보자. 누군가 약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 눈물을 흘리고 그의 영혼은 메말라가.
같은 사람이야. 사람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없기만 할까?
아니. 오히려 의외로 우리는 할 수 있어.
그건 나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야. 그런 거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갈 수 없겠지.
그저 사람을 보는 거야. 그럼 내 안의 사람이 일을 할꺼야.
극복하지 않아도 돼. 멋지지 않아도 돼. 사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돼. 깨어진 그대로여도 돼.
너는 너 그대로의 사람이야. 그 사람에서 시작 돼. 그 사람이 할꺼야.
사람. 사람새끼. 인자.
노숙인,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난민..
여기서 사람이 보여? 사람으로 보고있다고?
되물어봐. 네가 뭔가 하고 싶은 게 없어? 아니면 하지 못하는 게 진심으로 미안하지 않아?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알아가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넌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거야.
영상의 상황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야.
사람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노숙인이, 해고노동자가, 성소수자가, 난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던 이들의 미소가 보여? 상황이 모두 해결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옆에 있기에 피어난 그 자존감 말이야.
자기계발이 아닌 진짜 자존감은, 공동의 사람됨 곧 대자대비(혹은 연대)에 존재해.
자기계발은 두려움을 속이기 위해 상상된 현실이고, 대자대비는 진아(진짜 나)가 있는 진실의 현실이야.
이 영상을 처음 봤을 때 난 끔찍하다 생각했어.
애초에 강연자는 권력을 가진 위치이기에 저게 가능한 거고, 괴롭힘이란 건 그런 식으로 동화처럼 작동되지 않아.
자존감을 얻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또 다시 노력해서 자기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실행 못하는 진짜 자신은 초라하니까 버려두고는, 노력하고 실행하는 조작된 나를 대체하지. 내가 말하는 자기계발은 그런 거야.
그러나 여기서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당신은 다른 사람이 그런 자존감을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로 읽으면 어떨까?
왕따 당해봤어? 같이 왕따 되는 거야. 내가 자존감 잘 가져서 왕따를 피하는 게 아니라.
잘난 자리에서 조언해주는 게 아니라, 같은 옆자리로 가는 거지.
그게 진짜 자존감이야. 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이기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오히려 왕따 당하던 아이는 나를 괴롭히기 시작할 수 있어. 자신은 벗어나려는 행동이지.
하지만 어쩌면 정말 그 아이가 구원받고 회복될 수도 있어. 확률은 별로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일은 아니지.
바로 그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리로 들어가는 거야.
그 일은 영상처럼 고양감이 들지 않겠지.
그게 진짜야. 우리는 할 수 없어.
그런데 보자. 누군가 약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 눈물을 흘리고 그의 영혼은 메말라가.
같은 사람이야. 사람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없기만 할까?
아니. 오히려 의외로 우리는 할 수 있어.
그건 나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야. 그런 거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갈 수 없겠지.
그저 사람을 보는 거야. 그럼 내 안의 사람이 일을 할꺼야.
극복하지 않아도 돼. 멋지지 않아도 돼. 사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돼. 깨어진 그대로여도 돼.
너는 너 그대로의 사람이야. 그 사람에서 시작 돼. 그 사람이 할꺼야.
사람. 사람새끼. 인자.
노숙인,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난민..
여기서 사람이 보여? 사람으로 보고있다고?
되물어봐. 네가 뭔가 하고 싶은 게 없어? 아니면 하지 못하는 게 진심으로 미안하지 않아?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알아가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넌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거야.
영상의 상황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야.
사람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노숙인이, 해고노동자가, 성소수자가, 난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던 이들의 미소가 보여? 상황이 모두 해결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옆에 있기에 피어난 그 자존감 말이야.
자기계발이 아닌 진짜 자존감은, 공동의 사람됨 곧 대자대비(혹은 연대)에 존재해.
자기계발은 두려움을 속이기 위해 상상된 현실이고, 대자대비는 진아(진짜 나)가 있는 진실의 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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