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 축제에는 언제나 '음란'이란 것이 붙는다. 그것이 진짜 음란이 아니라 음란으로 보이게 하는 혐오일 수 있다.
몇 가지 논리들을 다른 외부의 상황들과 비교해보면 좀 더 뚜렷할 수 있다.
(1)번 사진은 제주도 러브랜드에서 팔고 있는 고추빵과 유두빵(왼쪽), 홍대오빵에서 판매한 고추빵이다(오른쪽). (2)번 사진은 퀴어문화축제에서 판매 되었던 보지쿠키와 초코추다. 보지쿠키는 성욕 때문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남자들에게는 벌려줘야 하면서도 더러운 것이라는 사회 속에서, 남근상은 있어도 여성의 성기는 수치스러워 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자는 메시지이자 대상화에 대한 질문이다. 초코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러운 성관계 속에서 더러운 몸이 되어 버린 성기에 대해, 이성애와 동일한 사랑으로 혐오에 대항하는 질문이자 프라이드다. 이들은 성욕을 자극하지 않는다. 성욕에 몰두하게 만드는 역할은 없다. 오히려 자기 몸에 대한 긍적일 뿐이다. 청소년들에게도 자신의 몸을 제대로 대면하며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하지, 음란함을 배우도록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적 대상화에 저항하는 올바른 인식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1)번은 용인되면서도 (2)번은 ‘음란’이 되는 사회가 있다. 그렇기에 (2)번의 존재는 성욕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 차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3)번은 예전 월드컵 응원 당시의 모습 중 하나다. (4)번 역시 예전 퀴어문화축제의 모습 중 하나다. 우리는 (3)번을 보며 월드컵 응원을 음란 응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4)번 역시 그렇게 다녀도 된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2)번에서와 같이 축제에 한정되어 더러운 몸으로 규정되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자는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여론과 함께 이제는 퀴퍼에서의 노출 수위는 조절되고 있다. 그래서 혐오세력은 몇 년 전의 자극적인 사진을 재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지금도 월드컵 응원 등에서는 특히 여성의 노출을 강조하며 건강한 섹시미로 소비하고 있고, 학교 축제 등에서는 어린 여성이 T팬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리를 벌리는 퍼포먼스에 열광하는 사회가 있다. 여전히 월드컵 응원에서도 다른 축제에서도 공공연하게 성추행이 발생한다. 반면 퀴어문화축제는 그 많은 인파에도 놀랍도록 질서적이다. 축제 때문에 노출을 배우지도 않는다. 성욕이 충만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할 때 타인의 몸을 대상화하지 않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청소년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에게도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는 기회를 준다. 진짜 문제는 성적 대상화의 사회가 원인이다. 동성애가 원인이 아니다.
(5)번은 올해도 3회째를 맞고 있는 대구의 축제다. 당연히 아이들도 함께 참여 중인 공공장소다. 퀴어문화축제의 목적 역시 애초에 성적인 축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5)번의 사진에 모자이크를 하고 '퀴어축제'라고 이름을 붙여서 보면 전혀 다른 사진으로 인식한다. 곧 '음란'이 진짜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하는 혐오가 진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미성년자들의 성교육 교제에서는 성기의 모양과 체위들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음란한 것이 아니다. (6)번의 경우는 예전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것을 누구도 기독교가 음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퀴어문화축제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시선과 생각들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진 몇 개를 전시해놓고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혐오다.
게다가 퀴어문화축제는 동성애 축제가 아니다. 양성애자, 무성애자, 간성 등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축제다. 이를 문화적으로 분화가 덜 되어 있는 '동성애'(성애는 성행위가 아니라 성적 끌림이나, 예전에는 성행위와 성애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말하는 것이 혐오다. 혐오는 동성애 찬성세력과 반대세력의 대결구조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갈등사회 속에서 자극적 컨텐츠를 양산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도 “나는 동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다”가 맞는 표현이다. “동성애 반대”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으로, "난 흑인을 반대한다” 혹은 일본에서 "난 조선인을 반대한다"와 같은 혐오표현이다. 곧 혐오가 방치되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인종혐오집회가 있고 특히 재일동포들에 대한 혐오가 크다. “조선 여자들에겐 돌을 던져도 되고, 강간해도 된다”, “조선인들이 살면 우리가 죽는다. 차별받는 건 우리다”, “너희들 죽여버릴 꺼다” 등의 외침들이 공공연하게 용인됐다. 이에 대한 반대측의 모임이 생겨났다. 이는 조선인 찬성과 반대의 대립이 아니라, 혐오를 하는 사람들과 혐오를 멈춰달라는 사람들이다. 혐오반대 시위와 함께 이 문제가 인식되어, 일본에서 법적으로 혐오표현을 금지하게 됐다. 법이 생길 때까지 대중들은 갈등으로 생각했지 혐오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다. 차별금지법은 반대측이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막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차별과 혐오를 막는 것이다. 그리고 법이 없을 때 우리는 혐오를 찬반 갈등으로 오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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