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왜 동성애 문제에만 분노하는가"
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121
기사의 글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혐오 표현들을 몇 가지만 짚어봅니다.
(1)
"동성애를 불편하게 느낀다"라는 표현은 틀린 표현입니다. 자신과 다른 성지향에 대해선 불편하다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성지향을 밝히는 것이 맞습니다. "나는 이성애자다"라고하는 게 맞는 표현입니다. 불편함에 대한 표현이라면 "나의 성지향의 특성상(혹은 문화적 학습특성상) 동성 간에 성적으로 친밀한 장면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가 맞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판단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깜둥이가 불편하다"와 같은 혐오발언이 됩니다.
(2)
"동성애라는 사회문제"라는 표현도 틀린 표현입니다. 동성애는 정상적인 성지향이고, 사회문제는 "동성애 혐오"입니다. 여성혐오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혐오의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미투운동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라 여성혐오 때문에 발생합니다. "동성애라는 사회문제"라는 표현 자체가 혐오표현입니다.
(3)
이 사회에선 최소한의 인권감수성도 부족할 경우가 많습니다. '혐오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인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혐오를 그쳐달라는 의견과 혐오의 의견이 부딪히고 있다면, 한쪽에서는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거고, 다른 쪽에서는 인권을 짓밟는 게 자유로워야 된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둘은 대등할 수 없습니다. 인권은 각자의 가치판단이 아닙니다. 혐오는 학습된 것이고, 다시 사실에 부합하는 가치판단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 인권은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의견이 충돌될 때 양쪽의 권리가 대등한 듯 고려되고 있다면 그건 혐오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 앞에서 사실이 무언지를 가리는 것이 혐오입니다. 혐오는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혐오는 내가 혐오스럽게 느끼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차별의 원인인 사회구조적 '혐오'라는 뜻의 혐오도 있습니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성혐오 아니다."라는 발언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내가 혐오하기 위해서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적 혐오가 학습돼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혐오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인식하지 못한 건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라도 혐오한 건 억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에 부합하는 판단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121
기사의 글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혐오 표현들을 몇 가지만 짚어봅니다.
(1)
"동성애를 불편하게 느낀다"라는 표현은 틀린 표현입니다. 자신과 다른 성지향에 대해선 불편하다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성지향을 밝히는 것이 맞습니다. "나는 이성애자다"라고하는 게 맞는 표현입니다. 불편함에 대한 표현이라면 "나의 성지향의 특성상(혹은 문화적 학습특성상) 동성 간에 성적으로 친밀한 장면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가 맞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판단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깜둥이가 불편하다"와 같은 혐오발언이 됩니다.
(2)
"동성애라는 사회문제"라는 표현도 틀린 표현입니다. 동성애는 정상적인 성지향이고, 사회문제는 "동성애 혐오"입니다. 여성혐오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혐오의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미투운동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라 여성혐오 때문에 발생합니다. "동성애라는 사회문제"라는 표현 자체가 혐오표현입니다.
(3)
이 사회에선 최소한의 인권감수성도 부족할 경우가 많습니다. '혐오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인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혐오를 그쳐달라는 의견과 혐오의 의견이 부딪히고 있다면, 한쪽에서는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거고, 다른 쪽에서는 인권을 짓밟는 게 자유로워야 된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둘은 대등할 수 없습니다. 인권은 각자의 가치판단이 아닙니다. 혐오는 학습된 것이고, 다시 사실에 부합하는 가치판단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 인권은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의견이 충돌될 때 양쪽의 권리가 대등한 듯 고려되고 있다면 그건 혐오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 앞에서 사실이 무언지를 가리는 것이 혐오입니다. 혐오는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혐오는 내가 혐오스럽게 느끼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차별의 원인인 사회구조적 '혐오'라는 뜻의 혐오도 있습니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성혐오 아니다."라는 발언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내가 혐오하기 위해서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적 혐오가 학습돼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혐오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인식하지 못한 건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라도 혐오한 건 억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에 부합하는 판단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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