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X > 임신중단 O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반대하며, 임신중단도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며, 임신중단권을 지지한다.
그렇게 어떤 살인도 반대하면서도 살인을 지지하고 있다.
임신한 당사자야 말로 임신중단이 기꺼운 일이 겠는가.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 생명의 문제에 진정으로 진지한 사람이 당사자 본인인 건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왜 임신중단권이 보장될 때에야, 임신중단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논의될 수 있고, 오히려 임신중단이 줄어드는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 본적은 있는가?
문명은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몸을 살해하고 있다. 여성착취라는 미친 살육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고는 마치 임신중단이 여성 개인이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문제인 것처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인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약자들과 뭇생명들을 약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업들과 물건에 대해, 돈이라는 지지를 통해 간편히 해택을 누리고 있다. 살인을 선택하게 만들었어도 내 손 더럽힌 거 아니니 문제 없다.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나는 정의롭고 행복하다.
그렇게 내 손 더럽히지 않는 정의를 들이밀며 배제시킨다. 괴물은 임신중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의 당사자를 배제시키고 개인의 선택으로 만드는 우리가 진짜 괴물이다. 낙태죄가 있을 때 낙태가 더 많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괴물들의 살인이 괴물들의 행복이 되는 나라니까.
애초에 콘돔자체가 임신중단이고, 몸과 성욕을 물질화하는 현대 산업이 그 일들과 함께 한다. 이에 대해 큰 문제의식도 부족하다. 그건 여성의 삶과 태어날 아이의 삶에 사회적 연대 책임감이 부족한 것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임신중단은 선택하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선택한 건 우리다. 낙태죄라는 이름으로 손 안대고 정의롭고 행복하고 배제시키는 선택을 했다. 함께 짊어지지 않는 선택을 했다.
내 손 깨끗하고, 죽음은 널어져 있고, 나는 정의롭고 행복하다. 정말 기괴한 모습이다.
제정신이라면 정말 제정신으로 생각해보라. 강간에 의한 태아가 죄가 없는거 정말 누가 모르는겠는가? 임신중단과 관련된 가치를 정말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혐오가 사라지면, 고통을 함께 짊어지면, 그 날에 임신중단과 관련된 법제화는 알아서 될 것이다. 법이란 이름의 위선적인 하얀 살인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를 진짜 세울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사형을 반대하는 나는 살인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단순히 합법화되어야 임신중단이 줄어든다는 계산이 아니다. 이 괴물들의 세상에서, 손에 피묻히게 강요되는 그 피의 자리에 함께 설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가해자다. 책임을 함께 질 것이다. 임신중단이 살인이라면 나도 살인자가 될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당사자의 고통을 오롯이 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 낙태죄 폐지 정도로 겨우 변명이나 하려고 하는 것일 터이다.
고작 그 정도인데도, 눈물을 함께 하는 그곳에서, 이미 알고 있었어도 괴물의 나라이기에 선택할 수 없고 누릴 수 없었던 생명의 소중함이, 그때에야 비로소 피어난다.
"내 몸은 내가 결정한다!"
이것이 보장되는 것과 태아의 생명권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함께 한다.
오히려 여성이 자궁이 되어버리면, 그때에야 태아는 덩어리, 물건 밖에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몸의 권리야말로 태아의 생명권과 동행하는 권리이다. 분리되어 작용되지 않는다.
임신중단권은 살인권이 아니다. 임신중단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된다는 배제야 말로 위선적인 하얀 살인이다.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반대하며, 임신중단도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며, 임신중단권을 지지한다.
그렇게 어떤 살인도 반대하면서도 살인을 지지하고 있다.
임신한 당사자야 말로 임신중단이 기꺼운 일이 겠는가.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 생명의 문제에 진정으로 진지한 사람이 당사자 본인인 건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왜 임신중단권이 보장될 때에야, 임신중단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논의될 수 있고, 오히려 임신중단이 줄어드는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 본적은 있는가?
문명은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몸을 살해하고 있다. 여성착취라는 미친 살육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고는 마치 임신중단이 여성 개인이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문제인 것처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인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약자들과 뭇생명들을 약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업들과 물건에 대해, 돈이라는 지지를 통해 간편히 해택을 누리고 있다. 살인을 선택하게 만들었어도 내 손 더럽힌 거 아니니 문제 없다.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나는 정의롭고 행복하다.
그렇게 내 손 더럽히지 않는 정의를 들이밀며 배제시킨다. 괴물은 임신중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의 당사자를 배제시키고 개인의 선택으로 만드는 우리가 진짜 괴물이다. 낙태죄가 있을 때 낙태가 더 많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괴물들의 살인이 괴물들의 행복이 되는 나라니까.
애초에 콘돔자체가 임신중단이고, 몸과 성욕을 물질화하는 현대 산업이 그 일들과 함께 한다. 이에 대해 큰 문제의식도 부족하다. 그건 여성의 삶과 태어날 아이의 삶에 사회적 연대 책임감이 부족한 것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임신중단은 선택하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선택한 건 우리다. 낙태죄라는 이름으로 손 안대고 정의롭고 행복하고 배제시키는 선택을 했다. 함께 짊어지지 않는 선택을 했다.
내 손 깨끗하고, 죽음은 널어져 있고, 나는 정의롭고 행복하다. 정말 기괴한 모습이다.
제정신이라면 정말 제정신으로 생각해보라. 강간에 의한 태아가 죄가 없는거 정말 누가 모르는겠는가? 임신중단과 관련된 가치를 정말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혐오가 사라지면, 고통을 함께 짊어지면, 그 날에 임신중단과 관련된 법제화는 알아서 될 것이다. 법이란 이름의 위선적인 하얀 살인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를 진짜 세울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사형을 반대하는 나는 살인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단순히 합법화되어야 임신중단이 줄어든다는 계산이 아니다. 이 괴물들의 세상에서, 손에 피묻히게 강요되는 그 피의 자리에 함께 설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가해자다. 책임을 함께 질 것이다. 임신중단이 살인이라면 나도 살인자가 될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당사자의 고통을 오롯이 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 낙태죄 폐지 정도로 겨우 변명이나 하려고 하는 것일 터이다.
고작 그 정도인데도, 눈물을 함께 하는 그곳에서, 이미 알고 있었어도 괴물의 나라이기에 선택할 수 없고 누릴 수 없었던 생명의 소중함이, 그때에야 비로소 피어난다.
"내 몸은 내가 결정한다!"
이것이 보장되는 것과 태아의 생명권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함께 한다.
오히려 여성이 자궁이 되어버리면, 그때에야 태아는 덩어리, 물건 밖에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몸의 권리야말로 태아의 생명권과 동행하는 권리이다. 분리되어 작용되지 않는다.
임신중단권은 살인권이 아니다. 임신중단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된다는 배제야 말로 위선적인 하얀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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