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하다'는 표현은 고인을 빗댄 표현이라 나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 성재기씨가 죽음에 이르게된 원인인, 자살 퍼포먼스의 배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 성재기씨는 사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생긴 반대 급부의 피해자다. 그는 가부장제에 물든 사회에 스스로도 물들었다. 그는 남성인권이란 포장지를 씌운 여성혐오를 위해 살아갔으며, 생활고로 퍼포먼스를 하다가 사고사에 이르른 것이다.
곧 가부장제가 그를 그렇게 살아가게 했고, 그를 거기로 내몬 것이다. 곧 그 죽음의 책임은 넓게 봤을 때 오히려 여성혐오다.
그런 측면에서 '재기하다'라는 표현은 여성혐오의 피해자들을-반대급부의 피해자 까지도-넓게 포함하는 단어로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 사회의 상태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불법촬영으로 자살한 피해자의 영상을 두고서는 유작이라고 소비하는 사회다. 위에서 말한대로 '재기하다'는 표현은 복잡한 관점이 존재하는 반면, 불법촬영 피해자의 '유작'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명확하다. 따라서 둘을 같은 수준의 표현이라 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작'이라며 희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순히 옳지 않다는 판단 정도에서 그칠뿐, '재기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만큼의 공격성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는 사회다.
여기서 '재기하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공격성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차별을 만들어내는 혐오에 대해 터져나오는 비명이란 측면도 혼재된다. 선재하는 가해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도덕적 잣대가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 불공평에 둔감하다. 이는 마치 괴사한 세포처럼, 겉으로 심각함을 느끼지 못할 뿐 속으로는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오히려 '재기하다'라는 표현 속에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이 담길 수도 있다. 혐오가 있는 사회에서 그 혐오에 대한 저항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마치 면역반응에서 괴사한 자기세포는 제거하는 것과 같이, 혐오의 사회구조라는 조건에 한해서는 격한 저항(비도덕성에 저항하는 비도덕성, 소위 시시한 강자로부터 시시한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 발생되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건강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고인을 빗댔다는 이유만으로도 '재기하다'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는 용어가 됐지만, 그래도 그 용어를 사용하는 데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관련된 사실을 파악하고 나니 가치와 정의에 대한 분열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 병든 사회 안에서 적어도 그런 분열적 고통없이, 단순히 자기 도덕감을 앞세우며 완전히 당당한 것보다는, 오히려 '재기하다'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더 건강해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 성재기씨가 죽음에 이르게된 원인인, 자살 퍼포먼스의 배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 성재기씨는 사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생긴 반대 급부의 피해자다. 그는 가부장제에 물든 사회에 스스로도 물들었다. 그는 남성인권이란 포장지를 씌운 여성혐오를 위해 살아갔으며, 생활고로 퍼포먼스를 하다가 사고사에 이르른 것이다.
곧 가부장제가 그를 그렇게 살아가게 했고, 그를 거기로 내몬 것이다. 곧 그 죽음의 책임은 넓게 봤을 때 오히려 여성혐오다.
그런 측면에서 '재기하다'라는 표현은 여성혐오의 피해자들을-반대급부의 피해자 까지도-넓게 포함하는 단어로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 사회의 상태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불법촬영으로 자살한 피해자의 영상을 두고서는 유작이라고 소비하는 사회다. 위에서 말한대로 '재기하다'는 표현은 복잡한 관점이 존재하는 반면, 불법촬영 피해자의 '유작'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명확하다. 따라서 둘을 같은 수준의 표현이라 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작'이라며 희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순히 옳지 않다는 판단 정도에서 그칠뿐, '재기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만큼의 공격성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는 사회다.
여기서 '재기하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공격성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차별을 만들어내는 혐오에 대해 터져나오는 비명이란 측면도 혼재된다. 선재하는 가해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도덕적 잣대가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 불공평에 둔감하다. 이는 마치 괴사한 세포처럼, 겉으로 심각함을 느끼지 못할 뿐 속으로는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오히려 '재기하다'라는 표현 속에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이 담길 수도 있다. 혐오가 있는 사회에서 그 혐오에 대한 저항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마치 면역반응에서 괴사한 자기세포는 제거하는 것과 같이, 혐오의 사회구조라는 조건에 한해서는 격한 저항(비도덕성에 저항하는 비도덕성, 소위 시시한 강자로부터 시시한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 발생되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건강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고인을 빗댔다는 이유만으로도 '재기하다'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는 용어가 됐지만, 그래도 그 용어를 사용하는 데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관련된 사실을 파악하고 나니 가치와 정의에 대한 분열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 병든 사회 안에서 적어도 그런 분열적 고통없이, 단순히 자기 도덕감을 앞세우며 완전히 당당한 것보다는, 오히려 '재기하다'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더 건강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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