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권리침해의 종류를 좀 더 자세히 나눠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역차별이라거나, 남성의 권리도 차별받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의 권리'와 '인권'은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남성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가 침해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인권까지 침해당한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여성이 겪는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사회구조적 혐오(개인의 혐오감이 아닙니다) 속에서 차별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권리 침해로만 정리될 수 없는, 인권의 문제가 됩니다.
개인의 권익을 보호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께 협력하여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일 뿐이지, 인권의 문제와 대립 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발생하는 갈등 중에서 많은 경우가 오히려 여성의 인권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함께 사라질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인권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종종 인간이 만든 법 너머에서 다뤄져야 하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권에는 '나중은 없다'는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적용해보자면, '남자가...'라는 식의 멘트를 쓰는 경우를 희화할 수는 있습니다. 이를 희화한다고 하여 가부장 사회 속에서 남성인권이 침해 받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런 멘트 자체도 여성혐오 구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되므로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년 이전의 여성을 칭하는 용어로 '청소녀'라는 대안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희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서로 논의해 볼 수 있으나, 당사자로부터 시작되는 대안운동이 함부로 판단되거나 희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인권과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2)
갈등의 원인 중에는 '공격적인 태도'가 언급되곤 합니다. 그러나 공격적인 태도 안에 있는 두 개의 뿌리를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의 뿌리는 '죄성'입니다. 억울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배타적이고 교만한 태도는 죄성에서 나올 것입니다.
또 다른 뿌리는 '고통에 대한 연대'입니다. 눈물과 비명을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타적이고 교만한 사회에 대한 분노입니다. 선재하는 사회 속의 배타성과 교만을 공격하는 것이며, 나에 대해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 있는 나의 죄에 대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성'과 '고통의 연대' 둘 모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죄성'이 있다는 것이, 그의 고함 속에 있는 '고통의 연대'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원칙이 있다면, '죄성'과 '고통의 연대'를 구분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사라지는 것으로 실체가 아니듯, '고통의 연대'에 동참할 때, '죄성'도 함께 극복되는 통로로 들어선 다는 것도 중요한 원칙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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