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라고 말할때, 단순히 지금의 그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어떤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라도 나의 것이 주체지 그가 주체가 아니다.

그의 모든 인생과 환경에서 지금의 그가 있다.
따라서 사실은 그의 지금 상태와 가치관이 그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모든 시간이 그다.
바로 그러한 그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다.

그렇기에 어떤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다만 계속해서 다시 만나는 관심과 수용이 있을 뿐이다.
결정되지 않은 모호함의 세계로 초대된다.

[2]
우리는 그 모호함에 대한 공포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호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를 완전하게 공포 속에 적셔놓는 것이다.
그러한 나의 그림자를 잡고 있을 때, 나는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버린다.

나 역시도 나를 판단한다.
그리하여 어떤 허상 속에 나를 가둔다.
주체는 내가 만든 허상의 '나'가 주체가 되며, 오히려 진짜 존재하는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판단하므로 허상의 내가 있게 된다.
오히려 진짜 나는 나올 수 없다.
내가 혼자서 나에게 관심과 수용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허상이 아닌 진정한 나를 보호하는 일은 오히려 타인과의 연결에서 가능해진다.
내가 모호함에 들어가 있다는 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를 감싸주기 위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모호함으로 들어가는 일이, 내가 나를 찾아주게 한다.
그가 감싸줌을 얻는 건, 내가 나를 찾는 과정 속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 대한 관심과 수용은, 단순히 지금의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3]
모호함에 들어간다는 건, 내가 그 모호함을 견디는 것으로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의 상황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를 회복 시키는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회복 자체가 주체여며, 모든 것이 회복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회복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고통의 나눔이 진짜 회복이다.
그것 없이 모호함은 없다.

나의 회복이 그의 회복을 불러오는 것도 회복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단지 고통을 고백할 뿐이지만, 그 고백이 퍼져나가며 세상은 회복되기 시작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이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회복과 이웃의 회복과 세상의 회복은 어느 것도 분리되지 않는다.

***
고통을 말할 수 있을 때 모호함이 가능해지며,
모호함이 있는 곳에, 관심과 수용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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