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돈 15만원이 생겼다.
그동안 참 열심히도 달려왔다. 감사하게도 내가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사람들이 많다. 적지만 이렇게라도 작은 여유를 얻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누군가 처절하게 얻은 돈을 내가 위탁받은 것도 아니다. 곧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런 돈으로 즐거울 수 있겠으나, 그런 즐거움이 종국적으로 행복의 삶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에 지방이 낀다.
이 땅에 서민적인 삶이면 충분한가?
정상적인 사회라면 그렇겠으나, 이 땅은 약한 이들의 생명 값으로 유지되며, 소외된 이들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그 불안증으로 형성되어 있는 사회다.
그렇기에 이 땅의 서민적인 삶이란 것 만으로도 사실 가난에서 눈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누군가는 가난을 피할 수 없다.
적금들면서 가난을 산다. 자기가 정말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가난은 깨끗한 물과 음식도 얻기 어렵고, 겨울엔 얼어죽을 수 있는 거다.
그게 가난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사회다.
거기에서 적금이 최소한의 지혜이자 성실이라는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적금을 통해 최소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대비한다고 할 때,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누군가는 삶 자체를 직면하고,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가난을 직면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적금을 들고, 빚을 내며 재태크를 하고 대비를 한다. 어떤 인생 들에게서는 눈 돌리게 된다.
서민이라는 이름으로 안정을 찾고 있으면 어느새 내게 계급이 생기는 것이며, 내가 나를 다른 계급으로 제한하여 그 계급 속에서의 최저를 생각한다.
그것은 비교와 불안증의 삶으로 초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쥐고 있는 그 적금이 단절을 만들어낸다.
단절된 영혼의 자리에는 지방이 낀다.
거기서부터 죽음의 병이 시작된다.
15만원의 공돈이 생겼다.
이걸 주변으로 돌리자.
나는 가진 것이 없어진다.
그러나 정말 없는가?
아니다. 그러한 나눔으로 가서야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난의 인생들에 조금 더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그 자리로 가서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 위기 앞에 있는 삶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그렇게 잃어버린 이들보다 나는 주변인들을 비롯해 가진 게 많다는 거다.
단순히 운이 좋은지, 나쁜지 때문에 너무나 다른 생명의 무게가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억울함을 함께 살아가면, 그때야 내가 가진 것이 선명해지며, 그렇기에 오히려 더 새로운 힘이 솟는다.
적금으로 돈을 메어두었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아니. 그 돈을 불안정한 삶에 놓여진 이들에게 부어보아라.
함께 죽음의 위기를 직면하라.
내가 배부른 데 그 필요성을 진정 이해할 수 없다. 관념이 아닌 생명을 함께해야 계급의 벽을 비로소 넘을 수 있다.
가난이 불안한 이유는 내가 사회구조의 희생양에 눈돌리고 사회가 만든 어떤 계급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진짜 가난은 불안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찌할 바 없이 죽음 혹은 생에 맨몸으로 던져진 것이다.
오직 거기에 가서야 진짜 내가 가진 것이 보이고, 사회가 없다고 말했던 생명의 힘이 솟는다.
언제나 그것이다.
사회가 말하는 안전, 사회가 말하는 행복으로
나를 가두지 않고
부어버린 만큼
그 만큼의 순환이 일어나고,
그 만큼의 씨앗이 씨앗으로 그치지 않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
그동안 참 열심히도 달려왔다. 감사하게도 내가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사람들이 많다. 적지만 이렇게라도 작은 여유를 얻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누군가 처절하게 얻은 돈을 내가 위탁받은 것도 아니다. 곧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런 돈으로 즐거울 수 있겠으나, 그런 즐거움이 종국적으로 행복의 삶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에 지방이 낀다.
이 땅에 서민적인 삶이면 충분한가?
정상적인 사회라면 그렇겠으나, 이 땅은 약한 이들의 생명 값으로 유지되며, 소외된 이들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그 불안증으로 형성되어 있는 사회다.
그렇기에 이 땅의 서민적인 삶이란 것 만으로도 사실 가난에서 눈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누군가는 가난을 피할 수 없다.
적금들면서 가난을 산다. 자기가 정말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가난은 깨끗한 물과 음식도 얻기 어렵고, 겨울엔 얼어죽을 수 있는 거다.
그게 가난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사회다.
거기에서 적금이 최소한의 지혜이자 성실이라는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적금을 통해 최소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대비한다고 할 때,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누군가는 삶 자체를 직면하고,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가난을 직면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적금을 들고, 빚을 내며 재태크를 하고 대비를 한다. 어떤 인생 들에게서는 눈 돌리게 된다.
서민이라는 이름으로 안정을 찾고 있으면 어느새 내게 계급이 생기는 것이며, 내가 나를 다른 계급으로 제한하여 그 계급 속에서의 최저를 생각한다.
그것은 비교와 불안증의 삶으로 초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쥐고 있는 그 적금이 단절을 만들어낸다.
단절된 영혼의 자리에는 지방이 낀다.
거기서부터 죽음의 병이 시작된다.
15만원의 공돈이 생겼다.
이걸 주변으로 돌리자.
나는 가진 것이 없어진다.
그러나 정말 없는가?
아니다. 그러한 나눔으로 가서야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난의 인생들에 조금 더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그 자리로 가서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 위기 앞에 있는 삶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그렇게 잃어버린 이들보다 나는 주변인들을 비롯해 가진 게 많다는 거다.
단순히 운이 좋은지, 나쁜지 때문에 너무나 다른 생명의 무게가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억울함을 함께 살아가면, 그때야 내가 가진 것이 선명해지며, 그렇기에 오히려 더 새로운 힘이 솟는다.
적금으로 돈을 메어두었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아니. 그 돈을 불안정한 삶에 놓여진 이들에게 부어보아라.
함께 죽음의 위기를 직면하라.
내가 배부른 데 그 필요성을 진정 이해할 수 없다. 관념이 아닌 생명을 함께해야 계급의 벽을 비로소 넘을 수 있다.
가난이 불안한 이유는 내가 사회구조의 희생양에 눈돌리고 사회가 만든 어떤 계급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진짜 가난은 불안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찌할 바 없이 죽음 혹은 생에 맨몸으로 던져진 것이다.
오직 거기에 가서야 진짜 내가 가진 것이 보이고, 사회가 없다고 말했던 생명의 힘이 솟는다.
언제나 그것이다.
사회가 말하는 안전, 사회가 말하는 행복으로
나를 가두지 않고
부어버린 만큼
그 만큼의 순환이 일어나고,
그 만큼의 씨앗이 씨앗으로 그치지 않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