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격리를 넘어서는 해방으로서의 동물권에는 서식처의 권리(장소의 권리), 생존권, 이동권, 동시적 관계의 권리(상호 평등권) 등이 포함 된다.
개체가 무엇을 누리고 소유하는지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르다. 개체는 관계 속에서만 위치를 갖는다. 관계가 권리를 가지는 것이며, 관계가 회복한 권리가 관계 안의 개체들의 권리의 회복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동물권은, 인간 개체들의 이득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상호 평등한 장소성을 회복하며 인간이 동물로서의 회복한 권리다.
인간은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한다면,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측면에 인간에게 동물권이란, 인간이 동물로서 동시적인 관계에 있는 인간의 동물권을 뜻한다.

이러한 동물권의 개념으로 도시권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 있는 이유는 일자리, 인프라 등 도시가 아니면 오히려 생존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물과 대지 없이 인간만 있는 곳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동물권으로 바라보면 도시인의 서식처는 먹을 것, 생필품이 오는 곳 까지를 포함한다. 작물을 길러내고 생필품을 만드는 마을 사이에 장이 열리고 행정 기관이 있는 구조와도 다르다. 전체 서식처에서 도시는 차별적 이권이 모이는 장소다.
생각해보자. 도시는 환경으로 치면 사막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직접 먹을 것, 삶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곳이 일을 구해도 더 구하기 쉽고, 최소한의 먹고 살기에도 더 유리해야 상식이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어 있다는 건, 그만큼 보이지 않는 차별과 이권의 착취가 있다는 의미다.

동물권은 동물 존재로서 관계의 권리다. 인간에게 동물권은, 차별 없는 동물의 관계가 갖는 권리로, 인간 동물권이다. 도시권은 그 중에서 특수 서식권에 포함될 것이다. 도시권은 그렇게 차별 없는 관계가 갖는 권리 가운데에 있다.
관계로 본다면 도시의 본질은  연결이다. 그러니 더 평등하게 가난해야 하는 곳이다. 지역으로서는 가장 가난한 지역이여야 하지만 그렇기에 평등의 가치가 가장 잘 실현되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도시 사람들이라는 높은 위치의 사람들의 권리가 아니다. 도시인들이 엮여 있는 서식처의 권리(장소의 권리), 생존권, 이동권, 동시적 관계의 권리(상호 평등권) 등이다.
곧, 도시와 엮인 농촌의 권리, 외국인의 권리, 비인간의 권리, 무역으로 엮인 지구 서식처의 권리와 같은 이 도시권이다.
도시의 문제 역시 그런 위계 차별에 의해 발생한다. 단순히 도시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위계가 근간이 되어 있기에, 도시인들만의 문제가 되어버린다면 그 위계가 더 교묘해질 뿐이다.
그것은 도시 안의 또 다른 격리와 제거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 여전히 도시인의 인간에서 박탈되는 일은 생겨난다. 차별이 근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도 도시 내의 평등만을 말한다면, 그건 도시의 문제를 정확하게 숨기고 위계를 강화하는 일이다.

도시는 분명한 존재이며, 차별과 위계를 만들어 내는 중심이다. 피해를 다루는 건, 가해자에게 남은 여력으로 피해자를 돕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의 가해에 맞서는 것이다.
동물권에서도 도시권은 특별히 다뤄져야 하는 주제다. 나중으로 마뤄져서는 안되는 동물의 권리다.

그렇다면 몸의 문제다. 도시의 모든 평등을 뭉뚱그려 말하는 건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평등을 누리는 자기 권력을 소비하는 것이지, 위계와 제거는 더욱 교묘해질 뿐이다.
몸의 문제라면 빈민, 철거민, 장애인, 난민, 비남성, 비인간 동물, 농촌 등 그 모든 비인간 중 어떤 몸을 가지기 마련이다. 다 뭉쳐서 말할 수는 없다.
몸의 투쟁이기에 가해자의 가해에 맞서기 위해서는 빈민, 비인간 동물 등 어떤 특정 몸, 특정 주제의 자리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 자기들만의 평등의 보장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언제나 더 거대한 차별로 유지될 뿐이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 뭉뚱그려진 평등을 말하 것, 젠더, 노공, 빈민 문제라도 자기 정체성 만의 이권을 말하는 것들은 사실 하나로 엮여 있다. 
몸의 투쟁은 내가 서 있는 특정 비인간의 몸으로 가해를 드러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다른 비인간과 연결하는 일이다. 그런 평등의 관계 속에서 나의 몸이, 내가 겪는 차별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태계의 허리인 개구리가 사라지면 모두가 무너진다고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연결 속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동물권이다.
내가 속한 정체성만 강화하고 다른 비인간과의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겉으로는 도시내의 문제와 싸우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도시 위계 차별을 교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장 가난해서 가장 평등할 도시의 권리, 그 도시권을 스스로 해치고 있는 것이다.

도시권으로서의 동물권은 도시에 서식하는 동물로서 앞장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귀엽게 생각하는, 혹은 불쌍하게 생각하는 비인간 동물을 인간 밑에 두는 노예 시스템 안에서 복지를 챙겨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 동물의 동물권, 비한국인의 동물권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도시권, 그 동물권을 스스로 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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