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성매매피해자 자활지원 조례 살펴보니…기간 2배 늘리고 주거지원에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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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보면 자활에 힘쓰면서 여성 인권을 보장한다는 듯이 군다.
자활 이데올로기는 왜 함정이며, 그것은 어떻게 내몰린 개인의 존엄성, 그 인권까지 빼앗는 일이 되는가.

자활은 제 힘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사회 인프라, 경제 세계화 등 애초에 제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자활이란 것은, 좀 더 정확히는 정상성 규정 속에서 선을 그어 자활로 규정하여 내몰고 책임지지 않는 선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주의, 국가주의 등 여러 차별주의 중 하나의 형태이다.

자활 이데올로기는 점점 더 자활이 필요하도록, 다시 말해 소수자가 밀려나는 사회 구조를 강화시킬 뿐이다.
동등한 존엄성에 이르기까지 자활이 필요 없는 정도로 평등권이 보장될 때, 자활이 자기에게 필요한 이들이 알아서 자활을 할 것이다. 오히려 자활이 원할 때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자활의 비율도 지금보다 훨씬 증가 할 것은 당연하다.

홈리스, 장애인, 소수자들에게 부여되는 자활 이데올로기는, 정상성 규정 바깥의 가치노동을 지우고, 생산노동 수단으로 계급화하고 가둔다.
그 가운데 정상성 규성 안쪽에서는 가치노동은 오히려 생산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게 한다. 그래서 다시 생산노동의 결과에 대해 기울어진 이득을 취하는 것이 정상화된다.
이러한 불합리함은 단순히 생산노동의 가치 회복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상성 규정과 차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선택적 해방은 없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생산노동의 가치 회복의 전형은 착한 기업 아닐까? 그런데 성장하는 착한 기업이란 것이 있는가? 어떤 기업의 성장은 아웃소싱, 빈곤한 가난한 외국 인권의 박탈, 자연의 파괴 등과 연결된다.
그러고선 돈 많은 한국에서 직원복지 챙기고, 남는 돈으로 기부나 좀 한다. 그것은 전혀 선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악하며 단지 일부 돈으로 면죄부를 산 것이다. 그러면서 정당성을 얻고 나서 착취를 여전히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박탈당한 이들은 더욱 빼앗기고, 시혜와 동정 속에 가치까지 빼앗아 자기 정당성으로 두른다. 역겹다.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을 다 한 다음에, 그거 이상을 해야 선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에서 지역으로 생각해보자. 재개발로 성장하는 선한 지역이란 것은 없다. 아무리 포장해봐야 더 세련된 착취와 계급과 내쫓음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자기 정당성으로 두르기 위해 내몰린 곳에 있는 마지막 존엄까지 약탈하는 것이다.

그래도 한계가 있더라도 돈 많은 곳에서 모본을 보이는 사회적 영향력이라며 변명을 하는데, 그게 정상성 규정 속에서 약자들의 가치까지 빼앗아 두르면서 정성상 규정과 차별을 더 강화하고 있는 거 아닌가?
영향력이란 정상성 규정 바깥에서 형성되는 영향력이어야 한다. 해방의 영향력이어야 한다. 그것이 기울어진 사회 속에서의 진짜 영향력이다.
이러한 영향력은 단순히 규모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 큰 규모 속에서 정상성으로 누린 것을 다 돌려줘도 정상성과 차별의 기울어짐을 막을 수 없다. 기울어진 시소 위에서 받침점 위에다가만 쌓는다고 그 기울어짐이 바뀌던가? 그리고 그 빼앗은 거 돌려주는 게 무슨 선함인가?
언제나 돈의 문제 너머에 있다. 몸의 문제다. 정상성 규정 바깥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이 되는 것, 그 관계 속에서 빼앗김을 공유하는 것이 기울어짐을 해소한다.
그 해방 속에서 돈이야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러한 몸의 연대에서는 기존의 계급적 시혜보다 더 많은 연대의 돈이 도는 것도 당연하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돈 내놔라! 그건 당연한 거다. 더 내놔라! 그거 절대 생색낼 것 아니다. 그리고 나서, 더 함께 한 몸, 한 공동체가 되어라.

자활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약자에게 마지막 남은 존엄까지 시혜와 생산노동의 착취 안에 가두어 빼앗고, 소비하고, 그 차별의 구조를 강화한다.
물론 가난은 악이고 부끄럽기도 한 일이다. 그러나 이 차별의 구조에서 가난하지 않은 것은 더 큰 악이고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하느냐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사실 지원을 하지 않는 것하고 그다지 구분도 되지 않는 조금의 차이다.
애초에 소유하는 것도 없고 가난하다면, 그들이 생색낼 돈은 오히려 이미 더 나은 곳에 가닿았을 것이다.
가난이 없어지는 세상은 더 많이 버는 세상이 아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가난해지는 세상이다. 모두가 자활할 수 있는 세상은 자활을 더 많이 차별화 하는 세상이 아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내몰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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