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란 말은 권력이다.
그 안에는 정상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대중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건강을 기원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는 평화가 거기에 포함된다.
그렇기에 이분법이다. 그렇기에 위계다.

그 권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은 대중에서 제외되고 과격한 이들이 된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은 오해가 많으니 우선은 이퀄리즘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포용이고 평화라 한다.
다시 말해서 가부장제 오빠가 규정하는 정상성 안에 존재하는 여성만이 정상적 여성이는 합의에서 시작해야 서로 포용하는 것이고 대화가 가능한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해방이 오나? 해방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여성이 여성이 될 수 있는 날이다.

정상성 받아들여 주면 정말 그들이 여성을 여성으로 봐주는가? 아니면 여성을 귀여워해 주는가?
그리고 여기엔 다른 이름들이 있다.
동물이 동물일 수 있는가? 아니면 동물을 귀여워해 주는가?
장애인이 사람일 수 있는가? 아니면 장애우 친구인가?
외국인이 사람일 수 있는가? 아니면 한국의 우월함 전도할 미개인인가?

귀엽지 않으면, 같은 사람이면, 열등한 이들이 아니면, 그들의 존재는 대중이 아니다.
그들이 귀엽고, 인격 없는 친구고, 말 잘듣는 착한 미개인 일때 그들을 받아들여 줄 수 있고, 평화롭게 아껴줄 수 있다.
건강을 기원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는 평화가 그런 것이다.
서로 평화로운 대화가 가능한 것은, 권력이 대화로 규정한 대화를 하기 때문이고, 애초에 그런 규정 바깥으로 배제한 것은 대화가 아님을 긍정했기에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 대중의 바깥에 민중이 있다. 인민이 있다. 생민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짓밟는 발 앞에서 붙들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언제나 불법/폭력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불법/폭력이 된 것은 그것이 정말 불법/폭력이여서인가?
아니지 않나. 오히려 거대한 권력이 짓밟고 그들을 불법/폭력으로 규정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세상은 그 규정을 벗어나서 생기는 붙듦과 울부짖음을 폭력이라 말하고, 규정 안에서 설득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귀여워해 줄 수 있게 귀엽고, 차별할 수 있게 친구로 존재하고, 해를 가하는 이들에게 해롭지 말면 된다고 말한다. 그게 설득이고 평화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정말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말한다.

그 안에서 존재는 짓이겨진다.
권력은 그러니 대중성을 획득하라고 한다.
그러지 않으니 인기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귀엽지 않으니, 동등하니, 미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듣지 않는 거라고 한다.
그 대중성에서 시작해야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니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듣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 평화이고 포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짓밟히는 이들이 오히려 폭력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평화와 포용의 권력은 그것을 휘두르는 이들에게나 인기 있는 것일 뿐이다.

간단하다. 짓밟히는 이유를 너희가 짓밟혀서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이의 이유가 피해자가 맞을만해서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중이란 이름으로 지금 그거 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일진에게 침묵하거나 동경하고 있는 거다.

그런 너희가 혹은 그런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평화로운 학급 분위기를 깨는 반항이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침묵하고 규정 내에서만 말하는 건, 같이 따돌림 당하지 않고 싶었던 거다. 그게 포용이고 평화라고 생각할 권력 안에 있었던 거다.
빵셔틀을 보며 비웃음을 누리거나, 혹은 침묵한 채 일진들 보며 자기 도덕적 우월성을 누릴 수 있는 그 포용과 평화 말이다.
그렇게 나도 자동적으로 귀여워 해줄 수 있는 위치, 친구라고 위에서 말할 수 있는 위치, 미개하게 여기고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위치는 없다.
다만 권력이라는 폭력이, 그 포용과 평화라는 폭력이 있을 뿐이다.
이제 이런 일 그만두자는 말이 언제나 과격한 말이 되는 것도 그게 애초에 과격한 말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하는 권력이었을 뿐인 것과 같다.
있는 건 위계적 이분법의 권력이다.

우리가 말하던 포용과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언제나 정상성을 규정하는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포용과 평화를 말하지, 그들에 대해서 포용하고 평화를 이루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게 대중성이다.
배제하자는 것도 하나의 의견이고, 배제를 배제하자는 것도 하나의 의견이니 서로 양보라하는 그 포용과 평화라는 폭력, 그 정상성 권력이 대중성이다.

인기가 없었던 이유? 단지 내가 일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의 도덕적 우월성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담할 권력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학폭 당하는 이가 나의 소중한 이었다면 그렇게 나는 우월하고 포용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나도 위계적 이분법의 권력이 필요했던 존재였을 뿐이다. 고백없이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위계적 이분법의 권력이 있기에 선택이 있다. 내가 거기에 가담할지, 다시말해 그 규정 안에서 포용하고 평화로울지, 아니면 같이 짓밟히고 배제되고 불법이 되더라도 이제 그만 두자고 말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과격하지 않으면 그 포용과 평화만 강대해진다.
배제된 이들 위에 설 수 있는 내 안전과 권력이 그렇게 강대해진다.

새롭게 시작해보자.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며 배제당한 곳에서, 같이 배제당하고 서로 인간이 되자.
동물이 열등이 되는 곳에서, 같이 열등해지고 서로 동물이 되자.
배제가 포용이고 평화라고 할 때, 배제를 배제하는 포용과 평화를 이루자.
솔직히 우리는 이건 안해보지 않았는가.
배제는 포용하면서도, 배제에 대한 배제는 배제라며 포용하지 않았지 않았나.
또 다른 권력 정체성인 자기 정체성이었지, 타자 정체성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타자를 해방해 주는 권력의 자리에 있었던 거지, 타자 자리에서 우리의 해방을 말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솔직히 우리 그거 말고 다른 건 다해보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가 서로 인간이, 서로 동물이, 그렇게 서로 불법이 되어보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