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주검을 두고, 세상을 위해 복제를 한다고 하면 그것이 괜찮아 보이는가?
이미 그는 생명도 아니고 결정권도 없으니 법적으로는 괜찮고, 이렇게 생산하는 배양육이 서민들에게 더 많은 고기를 제공한다면?

인간이라 안된다면 반려 동물의 주검을 두고 그렇게 한다면 어떤가?
그들의 삶, 그들의 탄생과 죽음의 존엄 모든 것이 제거 된다. 그건 어느 생명이라도 다르지 않다.
호러에 가까운 일이다.

성서에는 오병이어라는 설화가 있다. 빵 다섯 덩이, 물살이 주검 두 구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았다는 이야기다.
그 호러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생명의 존엄을 제거할 수 있는 위계로 대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대상화로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엄을 제거하고 똑같이 생산되는 고기 상품은 이러한 대상화와는 정말 다른가?
아니. 다른 삶의 존재들이, 그 삶 전체가 완전히 대상화 되어 똑같은 제품이 되는 것은, 정말 복제보다 더 끔찍한 일은 아닌가? 정말 아닌가?

성서 이야기에는 물살이 뿐 아니라 빵도 나온다는 것을 다시 주목한다.
우리는 식물을 제품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있나?
다시 말해 먹는 기쁨이 생명을 받아 생명을 잇는 행위가 되도록 하고 있는거? 아니면, 맛과 가격이 되고 있나?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있는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아니라면,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대상화를 계속해서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먹지 않는 것도 끝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비인간 동물의 고통도 내 정의감, 내 연민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먹는다. 대상화를 강화한다.
그런지 아닌지는 어쩌면 빵에 대한 태도로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삶에서 땅은, 물은, 농부는, 노동은, 자본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떤 장소들과 하나가 되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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