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징벌은 사실상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다양성의 중요 요소다.

위계적 배타성이 제대로 견제 되지 않을 때, 조화와 경계의 균형은 깨지고 결국 멸망으로 이어 진다.

위계적 배타성은 그 자체가 힘이기에, 결코 저항력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다만 개체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이러한 복수나 징벌을 개체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엘크가 그러하다. 그들은 관계의 균형이 깨어진 과도한 경계는 단일하게 급증하는 엘크와 같다. 그 불균형이 다양성을 줄이고 죽음을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가? 엘크를 징벌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위계적 배타성은 실상 인간의 종차별이다. 그렇다면 복수하고 징벌해야 하는 것은 종차별에 대해서다.

그런데 그 종차별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종차별을 수행한 인간에 대한 견제를 통해서, 종차별을 견제하는 것뿐이다.

이는 비슷한 것 같지만 큰 차이다. 개체주의로 접근하면 결국 늑대를 죽인 개인에 대한 징벌로 끝난다. 그러나 종차별에 대해 싸워야 하는 것이라면, 사회에 대해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국가적 보상은 최소한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시한 이들, 직접 시행한 이들, 이득을 본 이들 모두에게 복수와 징벌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 복수, 징벌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일 뿐이다. 물론 다시 다양성을 좀 회복한다고 해서 잃어버린 것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야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게 된다. 그 상실을 마주하고 애도할 수 있게 된다.

 

복수와 징벌을 관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예로 세포 안의 p53인자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p53인자는 암 억제의 핵심이다. 암 기작은 어떤 세포의 조화가 깨져서 끊임없이 늘어나 본래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p53인자는 세포가 조화를 유지하도록 인도하다가 결국 그 조화가 깨졌을 때 세포가 스스로 죽도록 만든다.

p53은 단순히 개체에 대한 폭력을 행사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다양성을 보존하는 진화라는 큰 조화 속에서 있으며, 그 전언을 전달하는 것이다.

큰 관계 안에서 이해될 때, 이것은 전체를 위해서 단순히 문제가 있는 세포를 처단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세포가 그 세포다워지게 하는 그 세포 본연의 모습이며, 그것은 단순히 개체가 아닌 모든 진화와 관계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관계의 회복이다. 전체를 위해서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관계를 회복하는 나다운 과정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조화가 깨진 세포는 엘크인가? 아니다. 인간의 종차별, 곧 미국이 맺고 있던 관계다.

어떤 개인이 자기희생을 하더라도, 그것이 관계회복에 있어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결과다.

 

관계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로 레밍도 괜찮을 것 같다.

레밍이 개체수가 늘어날 때 집단 이주를 하다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헤엄도 잘치기 때문에 그저 이주 자체가 죽음의 확률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자리를 찾는 목숨을 건 이주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일이며, 결국 그 다양성 안에서 개체 역시 지켜진다.

우리는 이를 개체주의적 관점으로 보고,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한 이타적인 자기희생이 아니라 단지 시력이 좋지 않아 발생하는 실수라고 이해하곤 한다.

그런데 이것을 관계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어떤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것은 다양성을 유지하는 레밍다움이다.

그런데 어쩌면 모든 조화는 자기희생적이다. 이는 자기의 완전한 죽음, 멸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로서의 자신을 지키는 것이 더 본질적인 것이다. 나라는 본질은 단지 개체가 아닌 관계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개체 자체의 생명이 지켜지는 것이 관계로서의 나를 지키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자기희생 역시 자기다움의 하나다. 죽음의 이주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에 관계의 관점으로 보자면 레밍다움으로서 여전히 이타적인 것이고 자기희생적인 것이다. 집단 이주 자체가 관계 속에서 여전히 절벽으로 뛰어 내리는 일이다.

이러한 레밍다움이 작동하지 않을 때, 기존의 삶의 자리는 더 척박해지며 동시에 레밍 안의 다양성 보다는 단일성이 강해져, 조화가 깨지고 생명 속에 죽음이 스며든다.

이때 복수와 징벌은 집단 이주를 하지 않은 레밍 개체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벌의 결과로 개체에게 죽음이 스며든 것이 아니다.

레밍다움의 관계를 끊어내는 요소에 대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때의 복수와 징벌은 단순히 개체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인 것도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적응 혹은 진화적 차원에 있다. 그 관계가 본질이다. 그 본질 안에서 개체에게 고통이 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복수, 징벌이 다양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지평에 있을 때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암세포를 제거하는 개체주의 같은 것이 아니다. 본래적 관계를 회복 속에 조화되어 있는 진화적 규모의 것이다. 관계적인 것이다.

'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병이어는 사실 호러다  (0) 2023.08.09
개체주의와 관계적 개체  (0) 2023.04.12
죽임당함의 생명  (0) 2023.02.06
존재의 고독  (1) 2022.10.07
관계 존재론  (0) 2022.03.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