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적 배제가 감옥이다.

동물도 그 감옥에 갇혀 있다.

동물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열등이 동물을 인질로 감금한 것이다.

가장 깊은 감옥으로 부터 해방될 때 모두가 해방된다.

 

생명은 조화와 배제의 균형이다.

위계적 배제는 이러한 배제의 조화 혹은 조화의 배제와는 다른 것이다.

배제가 약해질 때 조화도 균형을 잃고 결국 해체에 이른다. 한 종의 해체는 연결된다.

배제가 조화를 압도할 때 그것은 연결된 죽음을 담보 잡는다. 실상 둘 다 균형의 파괴다. 곧 죽음이다.

그러나 조화가 배제보다 강해지기는 어렵다. 바로 해체되기 때문이다. 그 빈 곳을 채우는 것이 애도다.

그러나 배제가 조화를 압도할 때, 그 개체는 더 강대해 질 수 있다. 그렇게 더 많은 권력으로 장악한다.

이때 위계에 의한 죽음에 대한 애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바로 위계적 배제다.

여기서도 죽음은 단지 개체의 죽음이 아니다. 사료를 먹이며 노예 동물들을 감금 사육할 때, 그 사료가 오는 것, 싼 똥이 가는 곳, 모두에서 죽음이 담겨 있다. 인간에 의해 늑대가 제거된 옐로스톤에서 엘크의 천적이 제거될 고통만을 보는 것은 엘크라는 종 자체에 죽음이 스며들게 한다. 이러한 개체주의 또한 위계적 배제다.

 

마찬가지로 해체를 통한 죽음에 대해서도 애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복이 아닌 공멸이 된다.

예를 들어 변화 속에서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하여 멸종하는 동물이 있을 때,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이 단지 자연스런 것이므로 애도할 것이 아닌가?  그것 또한 위계적 배제다.

변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어쩔 수 없음 때문에 더 큰 애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때 여기에서 정의하는 애도는 단지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오히려 애도라는 유기체적 상태에 드러나는 일부일 뿐이다.

애도는 감정의 공유로 나타날 수도 있고, 새로운 실천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죽음과 분리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는 삶으로 새로운 생명이 되는 과정이 애도다. 애도는 몸이다. 유기체적인 것이다.

'공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을 애도하며  (0) 2023.05.31
다름은 같음이다  (0) 2023.05.04
자연은 소중하다는 것도 대상화다  (0) 2023.03.25
동물은 종교적 표현이다  (0) 2023.02.25
죽은 이후에 획득하는 주체성  (0) 2023.02.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