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분포곡선은 가치 스펙트럼과 인원수에 있어서 정규분포곡선을 따른다.
한쪽은 타자화에 대해 저항하는 가치고, 다른 한 쪽은 위계적 이분법이다. 타자화에 대한 저항은 생명평화, 해방으로 나타난다.
그림은 위계적 이분법이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가부장제 사회의 분포 그래프다.

(1) 두 개의 힘
'위계적 이분법'과 '타자화의 극복' 모두 생명의 근간이 되는 힘이다. 그러나 두 힘 간에 균형이 맞지 않을 수 있다. 두 힘의 균형에 맞춰서 곡선의 분포는 달라진다. ‘타자화에 대한 저항’과 ‘위계적 이분법’은 반비례한다. 다만 ‘타자화에 대한 저항’은 그 특성상 최대가 50%다. ‘위계적 이분법’은 계속 증가할 수 있으나, 100%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 역시 생명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화에 대한 저항’이 언제나 최소한도로 존재한다.
한편 ‘위계적 이분법’은 외부의 힘이 없다면 그 자체로는 비가역적 특성이 있어서 두 힘이 서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풍선 두 개를 붙여 놓은 경우처럼, 점점 위계적 이분법의 힘이 커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신제국주의의 경제세계화 안에서 국가주의적 우경화를 보이는 경우, 혹은 부족과 제국의 전쟁에서 제국이 지배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파산은 기존 위계적 이분법의 구조가 해체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그 구조가 유지되면서도 점점 더 세련되어 지는 과정이다. 그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외부의 힘은 파산이 아니라 멸망(멸종) 혹은 종말이다.

(2) 대중성(최빈값)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다. 이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균형을 더한 값을 반영하는 위치다. 이들의 수는 ‘위계적 이분법’의 힘에서 ‘타자화에 대한 저항’의 힘을 뺀 정도로 우경화된 정도를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른쪽으로의 힘이 9, 왼쪽으로의 힘이 1이라면, 이들은 8정도로 오른쪽으로 기운 가치를 지닌 이들이다. 가장 많은 인구수가 여기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들은 두 힘에 대해 중립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최빈값의 기본 성향은 ‘유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지'는 양측의 '차이의 정도'에 대한 유지인 동시에, '차이의 정당성' 자체에 대한 유지가 포함되고 뒤섞인다. 곧 '위계적 이분법'과 '타자화에 대한 저항' 사이의 조율이 아니라, '차이의 정도'와 '차이의 정당성' 사이의 조율을 한다. 그렇기에 결국 가만히 있을 경우 차이의 정도는 조금씩 늘어난다. 단순히 오른쪽으로 +8이 아니라, 8+알파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위계적 이분법'의 비가역적인 특성이 개인적 혹은 구조적으로 반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계적 이분법의 힘을 점점 더 강화하고, 타자화에 저항하는 힘을 점점 더 약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곧 두 종류의 힘에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위계적 이분법으로 기운다. 그래서 스스로도 조금씩 오른쪽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위계적 이분법'을 점점 더 강화해 나간다.

(3) 극단적 위계적 이분법
대중이 따르고 있는 힘, 곧 위계적 이분법을 긍정하는 이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차이의 정당성'에 대해 응답하는 이들이다. 대중은 자신들과 이들을 구분하고 또 구분되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대중 역시 '차이의 정당성'에 대해 점진적 지향을 가지는 바, 이들과 대중은 정도의 차이이지, 지향점의 차이는 아니다.

(4) 중간적 가치(평균값)
힘의 작용이나 인구수와 상관없는 가치의 중간 지대다. 이들은 다양한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적 가치 판단을 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의 중간적 판단을 하는 이들이다.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위계적 이분법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 이들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차이의 정당성'에 대해 거부한다.
이들은 두 가치 차원에서 왼쪽이다. 대중이 보기에 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가치의 색깔을 지녔기에 왼쪽이다. 한편으론 기본값이 위계적 이분법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 그 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속도가 0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만히 있는 이들이 +알파 만큼 왼쪽으로 치우쳐저 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이들 역시 사회 속에서는 '빨갱이' 혹은 '메갈' 등으로 불린다. 가부장제(위계적 이분법)가 강한 사회에서는, 이 중간적 가치를 따르는 이들 자체가 이미 극단적 위계적 이분법의 세력보다도 인구수가 적을 수 있으며, 그렇기에 다를 바 없는 극단 세력으로 분류된다.

(5) 윤리학=중도(중앙값)
사람들 사이에 중도를 지키며 치우치지 않는 이들이다. 다양한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적 가치 판단에 위치하는 것이 이들이다. 이들이 대중으로 표현되는 권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의 마지노선이다. 이들은 '차이의 정당성'에 대해 호응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이들 사이에 존재한다.
이들의 관심사는 최빈값과 중앙값을 평균값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각자의 위치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 채로 갈등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런 측면에서는 '차이의 정당성'에 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차이의 정당성'은 가만히 놔두면 계속 오른쪽으로 위치를 바뀌려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 역시 이들이 +알파 만큼 왼쪽으로 치우쳐저 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윤리학의 전략은 대중성이 확보되는, 다시 말해 공공성의 논의를 통해, 양측이 줄어들고 최빈값이 늘어나는 분포로 바꾸는 것이다(첨도의 증가).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곧 대중의 양측에 위치한 인구수를 줄이고 대중으로 포섭하여 갈등의 빈도를 줄이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다.
윤리학은 그렇기에 자신보다 오른쪽의 삶의 자리를 포괄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로 옮겨가서 '대화'한다. 이러한 '대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대중의 위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 윤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렇듯 최빈값(대중)을 향해 자신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 '대화'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실천과 마찬가지로 평균값의 사람들에게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중간적 가치에 있는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다만 ‘대화’를 통해 최빈값으로 옮겨지도록 한다. 이 대화는 대중성의 대화다. 대중성의 대화는 '차이의 정당성'을 전제한다. 그와 반대되는 대화인 '타자화에 대한 저항'의 대화는 윤리학의 관심은 아니다.
이들은 왼쪽의 위치도 이해하는 동시에 대중성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듯 대중과는 다른 원리로 +알파만큼 오른쪽으로 기운다. 대중의 입장에서, 생명평화의 가치가 반영되는 방식은 대중의 언어로 소통하는 윤리학의 방식이라 믿어진다. 윤리학에서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옮겨지는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서 ‘차이의 정당성’에 저항할 뿐, '차이의 정당성' 자체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보니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가는 흐름 자체를 역행하지는 못하며, 오른쪽으로 가는 속도를 늦출 뿐 결국 합류한다. 위치를 옮기지 않는 본인들의 전망과 달리 위치는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기운다.

(6) 생명평화, 해방
'차이의 정당성'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그 반대의 가치를 말하는 이들이다.
'타자화의 극복'에 대해 응답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힘이 작용할 때, 더 큰 기울어짐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혼자만으로는 그 힘을 멈출 수는 없다.
두 개의 방향성이 필요하다. 하나는 모두가 '차이의 정당성'에 대한 반대의 방향, 곧 타자화의 극복을 이루는 방향으로 옮기는 것이다. 모두가 왼쪽으로 위치를 옮기라는 것이다(왜도의 감소). 이는 위치를 고수하려는 윤리학에 반대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모래성을 생각하면 된다. 높이를 줄여서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윤리학이 대중 분포를 높이고(공공의 대화) 극단을 줄여 갈등을 줄이는 방식이라면, 타자화의 극복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갈등의 의미를 바꾸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대중의 높이를 낮추라는 것이다(첨도의 감소). 이 역시 윤리학에 반대되는 방법이다.
중간적 가치가 윤리학을 모호하게하고 대중적 윤리가 아닌 타자 지향적 윤리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대중에게 이들은 반윤리적인 이들로 인식된다.

(7) 종합
생명평화, 해방은 이러한 분포 속에서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윤리학의 자리로 오기를 요청한다. 그렇게 하여 대화를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해결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어떤 문제'냐는 것이다. 힘의 불균형의 문제에 있어서 그런 접근 방법은 위계적 이분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애초에 ‘차이의 정당성’을 전제하는 대화다.

사람들은 갈등을 우려한다. 그러나 그동안 갈등이 없어서 평화롭게 된 것이 아니라, 더욱 가파른 기울기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차이의 정당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중간적 가치를 가진 이들이 생명평화, 해방을 향해 인위적으로 왼쪽으로 향하고, 윤리적 자리 역시 왼쪽으로, 대중 역시 왼쪽으로 향할 때, ‘타자화에 대한 저항’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렇듯 두 종류의 대화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중간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혹은 윤리학의 언어를 사용하면 갈들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차이의 정당성’을 전제하는 대화를 하자는 의미다.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대화와 ‘차이의 정당성’을 전제하는 대화는 다른 대화다. 이 둘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윤리학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럴 때 갈등의 빈도가 줄어들고 대중을 향해 기운다(기울기의 강화).

‘타자화에 대한 저항’의 대화는 이와 다르다. 내가 나보다 왼쪽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소외되는 삶의 자리를 옷입는 것이다. 갈등의 책임은 약자에게만 비가역적으로 부담되었는데(기울기를 거스르는 반역), 이런 노예제의 멍에를 나눠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갈등의 의미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대중이 요구하는 윤리적 대화는 애초에 존재하고 있는 '차이의 정당성'을 전제하는 대화다. 이와는 달리 애초에 존재하고 있는 '타자화에 대한 저항'에 반응하는 대화가 있으며, 이것은 언제나 반역의 언어가 된다. 그러나 드랙이 오히려 존재자체로 성별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다른 삶의 자리의 옷을 입어 '타자화에 대한 저항'을 반역으로 규정하는 권력을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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