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남성으로서 외성기를 제거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섭리를 주장하던 그는, 주어진 본래대로의 몸이고, 호르몬 건강도 있는데 극단적 생각이라며 조롱의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본래대로의 몸? 건강? 애초에 무언가 완전히 순수한 것이 있는가?

당신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
여성이 죽고 있고, 퀴어들이 죽고 있다.
당신은 가부장제 남성을 정상성으로 규정하고 있고, 벌어지는 비극들을 특별히 잘못된 개인의 문제로만 만들어도 되는 권력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나로서는 그런 것이 훨씬 극단적인 것이며,
거기에서 더욱 큰 남성의 왜곡을 발견한다.

건강은 오로지 정상성 규정 속의 호르몬 상태로만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육식을 기준으로 한 현대인의 건강 기준은, 이미 육식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발생하는 인간 종에 대한 약탈까지 전제하는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의 건강성을 해치는 위계적 건강이 정말 건강인가?

외성기를 잘라냈을 때 거기서 다시 회복되는 남성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왜곡을 조금이라도 덜어낸 남성으로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 세상과 관계 맺는 것을 상상해 본다.
내 몸은 사회가 규정한 이분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건강 안에 있지 않고, 세상과의 건강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가부장제 세상에 남성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사고상태와 다름없다.
고작 작은 살덩이를 떼어냈을 때 우리가 만들어갈 남성의 회복이 먼저 있고 나서,
그 후에야 작은 살덩이도 제 역할을 할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서, 남근 사회의 맥락 속에서 그거 달려 있는 채로 정말 얼마나 왜곡된 남성에 대한 회복이 가능할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성기 제거는 현대 사회 속에서 스스로 남성으로서 안전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다.
강제적인 것이라 조금 다른 경우겠으나, 반려동물의 중성화(*이 용어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젠더로서 중성이라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활 전반에 있어서 그의 안전을 위해서 이뤄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인간에게만 안전을 위한 조치를 문제시 하는 태도에서 이미 위계가 드러난다.

당신이 말하는 섭리와 건강은 폭력과 위계를 정상화하고 비가시화한 것이며, 내가 아는 섭리와 건강은 그것에 저항하는 종류의 것이다.
당신이 정상적인 것이고, 내가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그래도 되는 극단적 권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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