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이 잠들 듯이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
보통 그리 이상하게 들리진 않는다. 내게도 많은 날이 그렇다.

정말 가끔 이대로 죽기 아깝다는 느낌이 있는 날이 있을 때가 있긴 하다.
그런 날이면 신기하다. 그만큼 얼마 없는 날이기도 하고.
보통의 대부분의 날들은 무감하거나 그대로 영원히 눈감으면 좋겠다거나 그 둘을 왔다갔다 한다.
나도 죽을 것 같다거나, 그래서 죽고싶다거나 그런 느낌이 뭔지 아는데, 그런데 그건 그런 느낌과는 다소 다른 감각이다.

한편으론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말해질 수 없었던 생이 드디어 좀 더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하는 일과도 닿아 있다.
아마 그런 종류의 일과 연결된 감각일 것이다.

물론 고통없이 죽는 날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신적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신이 있다면, 그 죽음을 도와줄 꺼라고 믿는다.
물론 그 신은 누군가를 삶으로 건져주기도 하는 동일한 신이다.
사람을 사랑해서 살리는 신이라면, 당연히 죽음을 도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난 또 내일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또 내일을 충실히 살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삶만을 인정 받거나,
고통없이 눈감는 밤을 바라는 삶이 그저 불쌍하게 여겨진다거나, 혹은 한심하게 여겨진다거나, 마냥 부정 당하거나 그런다면,
난 그게 더 싫은 일 같다. 그거 정말 별로인 일이다.
차라리 그건 그래도 되는 권력 같은 것일 뿐이다.

당연히 죽음은 나쁘다. 그건 혼동될 수 없고, 혼동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어떤 삶은 죽음보다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절대 어떤 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다.
유기체라는 것, 존재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 그저 그것 때문에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어떤 삶이 있다.
그래서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누구의 탓도 아니면 안될 일들이 있다.
그렇게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들이 모이는 곳.
존재하지 않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미지근하고, 거기엔 파도가 없다.
모든 영혼 안에는 그 무엇도 해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도 해칠 수 없으니까 죽음이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납작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모두가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무엇이어도 괜찮다. 무엇도 당신을 해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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