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옥은 혼자서만 하는 것을 탈옥이라 부르진 않는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탈옥은 지배구조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한탄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삼성주식을 사는 사람에게는 침묵하는가.
애초에 주식 시스템 자체가 경제세계화 속에서 약소국의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현대판 노예제를 구성 요소다.

한국에서는 서민이라도 세계적 관점 볼때는 불평등한 이득을 얻고 있는, 이재용보다 작은 부자다.
경제 상위국이라는 착취를 유지하는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우리다.

최소한의 돈은 필요하다는 말이 정말 최소를 의미한 적은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씻고 싶을 때 수도물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단적 풍요다.
한국 땅에 지금 인구 지지할 물이 충분히 있지는 않다. 농산물 등을 무역이란 이름으로 피부색 조금 다른 가난한 이들의 땅과 노동과 물을 싼 값에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원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소유를 버리지 못해 스스로는 위선적이게 보일지라도, 그런 우리가 하는 저항은 나도 모르게 닿아 있는 권력 만큼 힘이 있다.
우리가 느끼는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막막함보다,
가난한 이들과 새로운 가난한 존재들이 경험하는 막막함은 더욱 거대하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우리가 더 앞 서 있는 자이다.

죄책감이나 사명감이 아니다.
우는 이가 있어 그 앞에서 울부짖을 수 있다.
함께 운다.

탈옥을 비판하는 건 당연히 해야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탈옥의 가담자임도 고백해야 한다.
오히려 그때에, 그의 탈옥이 더욱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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