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기에 함께 지워지는 일은, 개인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워지겠다는 의지는 애초에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사회는 애초에 구조적으로 타자화된 이들을 지우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다. 그렇기에 지워지지 않겠다는 의지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나, 지워지지 않음을 성공하는 일은, 언제나 배타적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며 오히려 더 잘못된 일이다.
함께 지워지는 일이 옳은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함께 지워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더 잘못된 것이기에, 그래서 함께 지워져 가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역린이다. 사회가 바뀌는 가능성은 사회가 지운 거기에서만 생겨난다.
이때 함께 지워지는 일은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언급했었다. 함께 지워지는 일은, 개인이 아닌, 지워진 거기에서 서로 만나는 마주함이 새로운 얽힘을 만들어내서 가능해진다.
다만 이분법적 위계가 만들어낸 장벽 역시 개인의 의지로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존재할 수 없도록 타자를 지우는 이 사회를, 타자가 지워지지 않는 사회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런 건 달콤하고 거대한 속임수일 뿐이다.
마주함을 통해 함께 우리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절대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위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다.
지워진 타자의 존재를 드러낼 수는 없다. 다만 비존재성을 고발하고, 우리가 될 수 없음을 고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거기 그 순간에서 지워짐이 멈춘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우리가 발생한다.
내가 지워지는 힘을 내는 것이 아니다. 지워짐으로 밀려난 장소와 시간에서의 몸의 마주함이, 존재할 수 없는 우리를 만든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우리 속에 있는 내가, 세상 속 나와 중첩된다.
그렇게 존재할 수 없었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존재 바깥에서 존재로 중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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