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의 현장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 그런데 그건 표현 그대로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갔던 사람은 무엇가 얻어 간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반대로 가지 못한 사람은 부러워한다.
그래서 인기 있는 현장, 혹은 색다른 현장, 참혹한 현장일수록 좋다. 무언가 직접적으로 와닿는 도살장 비질이 길거리 횟집에서도 볼 수 있는 물살이 비질보다 인기다. 그렇게 참사는 소비된다.

특정 정체성에 대해 도취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종의 우월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효능감으로 온다. 또 다른 형태로는 교차성이니 다양성이니 말하며 무언가 진정한 답을 알고 있다는 느낌, 일체감, 고양감 등이 있다. 잘 알 수 없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이 역시 우월감이다. 이들은 모두 대중에게 잘 먹힌다. 왜냐하면 그 우월감 안 깊은 곳에 있는 본질은, 사실 불안,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참사는 소비된다.

아리셀 다녀왔다고 현장 사진을 찍어올린다. 피해를 알리니 좋은 일이라고 여겨진다.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곧 불안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람, 우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이 느낀 것, 자신이 본 것들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된다.
그것이 참사를 자랑하는 일이다. 겉으로 자랑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고통을 전시하는 일에서 정말 고통은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찍어 올린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구경하고 온 의미가 무엇인지를 사회적 흐름에 맡길 뿐 고찰하지 않아도 되는 건 권력이다. 그건 정말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것일까?
참사가 소비될 때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진다.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러나 참사는 현상일 뿐, 그 본질이 되는 것은 비루함, 무의미, 사실은 무엇도 아니라는 현실이다. 이에 함께 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자신도 무엇도 아닌 존재가 되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그건 참사보다 더한 고통과 불안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함께 참사가 되기 보다는 참사를 소비한다.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들이 넘쳐나며, 부조리한 세상은 여전히 굳건하다. 아니 점점 더 세련되어 져 간다.

현장이 의미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반대다. 그렇기에 오히려 현장에 가야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슈가 아닌 삶이 되어야 한다. 내 몸이 참사가 되어야 한다.
참사의 몸은 참사 앞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과 다르다. 그 몸은 기능할 수 없는 몸, 죽음의 몸이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감각과 유사할 것 같다. 그 감각은 참사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감각을 지우기 위해, 타자에게 그것을 짐 지웠다. 내가 그것을 지울 수 있는 위계가 있어서 평소에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뿐이다.
마음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능할 수 없는 몸이 된다. 둘 다 마음이 무너졌지만 한 쪽은 소비로 연결되고, 다른 쪽은 죽음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소비를 극복하는 힘, 죽음으로 연대되는 힘도 결국 현장에서 온다. 내가 아닌 현장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현장에 가야한다. 나라는 정체성으로 현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발가 벗겨진 몸으로 현장에 가야한다. 비극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된 참사를, 바로 그 우리의 죽음을 비명 질러야 한다.

우리들은 현장을 통해 말한다. 그런데 소비든 죽음의 연대든, 보여지는 것, 말하는 언어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것은 반대다. 보여지는 것 너머의 것, 성과 너머의 것이 있다.
소비의 사회에서 개인이 소비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운동조직의 경우, 여러 명이 함께 가더라도 개인들의 합일 뿐이다. 다만 여러 명이 간 만큼 더 세련된 소비, 당위성, 사회정의, 효용감 등이 키워진다. 소비하는 이들에겐 고양감이 있다. 이는 힘을 마주하는 것이지, 서로를 마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비가 아닌 죽음의 연대 속에는 반대로 무력감과 비루함이 있다. 공동체는 운동조직들과는 반대다. 보잘 것 없음, 인정 받을 수 없음, 의미 없음이 지워지지 않고 서로를 마주하게 한다. 그때 참사는 결국 내 몸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몸의 언어는 정리된 언어가 아니라 유족들의 언어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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