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의 현장을 보면서, 무기력해지곤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기력함이 무엇인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런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안에서, 한 몸으로 짓눌리고 있는 온 우주가, 온 세상 가득하게 함께하고 있는 그 무기력함이다.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느끼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무기력함이다.
무기력함 뿐만 아니다. 모든 종류의 고통이 그렇게, 고통의 본질로 연결되는 전자와 자기의 느낌으로 귀결되는 후자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그 고통은 생산성으로 말할 수 없는 더 근원적인 것, 존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참사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내 고통이 연결된다. 그러면 이제 고통 자체와 고통 받는 존재 자체가 드디어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고통의 연결은 거대한 고통과 비교하여 내 고통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게 되는 건 반대로 고통을 연결하지 않아서 고통 역시 힘의 논리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고통의 연결은, 작은 고통이라도 다른 유명한 고통들과 비교되거나 하는 게 아닌, 결국 하나 된 거대한 고통, 다시 말해 어떤 것도 사소하지 않은 우리의 고통임을 알아차리게 되는 일이다.
이는 존재의 원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개체의 존재는 일종의 영혼으로 된 주소와 같은 것이다. 우리로 된 지리 속에서 고유의 주소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서의 나를 아는 것은, 개인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마주할 수 있게 하고 지워지거나 도구화 되지 않게 한다.
고통의 연결은 오히려 진정한 내 존재의 고통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후자의 경우는 자기가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것의 강점은 자기를 위하는 데 있다고 종종 오해되곤 한다.
그런데 나의 고통이 세상의 고통, 우주의 고통과 연결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가 아닌 '나'라는 '권력'이 고통을 소유한다. 전자의 경우엔 나라는 존재가 존재의 원리 속에 있다면, 이 후자의 경우엔 나라는 권력은 개체중심주의의 자기 중심성 속에 있다.
개체중심주의는 유기체적 존재가 아닌 개체이게 하는 권력에 힘을 더한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는 내 존재의 고통 역시 권력의 도구가 된다. 이를 알기 쉬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고통에 대해서 자기 정체성 바깥의 이들을 이기는 것 자체에 중심을 두는 일이 강화된다.
힘의 논리는 소유의 논리다. 고통의 연결을 모르면, 상대방의 고통 역시 내 것으로 소유하려하면서 상대방의 존재 역시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된다.
한 끗 차이인데, 그건 연결로서의 동질감이 아니라, 결국 내가 안전하려는 권력으로서의 동질감이다. 그럴 경우, 종종 시혜적이거나 성과적인 위치에 가 있게 되기 쉽다.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이 둘을 구분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다. 결코 혼자서는 정신차리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혼자가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함께 바라봐 줄 공동체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은 복합적이다. 그러니 우선은 연결되어진 고통인지, 자기 소유로서의 고통인지, 굳이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은 공동체의 시간 안에서 뭐든 내놓는 것이 순서다.
그 안에서 서로를 바라봐주며 발견해가는 과정을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서로의 고통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이 오게되는 세상 속의 고통을 함께 바라본다. 이것이 개인이라는 주소가 있을 수 있게 하는 우리라는 영혼의 지리를, 함께 발견해나가고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영어를 배우는 것만 해도 그렇게 어려운데, 이 작업이라고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운동하는 것처럼, 밭을 경작하는 것처럼 꾸준히 만들어 가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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