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별의 자기결정권 주장은 이념적 식민지화"라는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무지에서 기인하며, 그렇게 몰라도 되는 차별입니다. 이는 '이슬람이 악이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여성과 남성의 두 가지 성을 다 가지고 있는 간성(intersex)은 어떠한가요. 양성 고정관념이 있어서 또 다른 성을 인정하지도 않죠. 만약 제3의 성이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간성인 사람 스스로 여성이나 남성으로 정체화하면 안되는 걸까요?


성별 자기결정권과 제3의 성은 선택의 문제라는 건 편견입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오드아이와 같이 단지 소수일 수 있을 뿐, 온전한 건강함입니다.


만약 '근본적인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 가정한다 하더라도, 성별 자기결정권과 제3의 성이 이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이 근본적인 여성과 남성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회에 의해 규정된 '남자됨', '여자됨'은 항상 변해왔습니다. 이는 사회문화의 산물이며 곧 인간의 손으로 깎아 만든 우상이죠. '근본적인 남성과 여성'이 이것으로 대체되어 왔습니다.

성별 자기결정권과 제3의 성은 오히려 진실을 보게 합니다. 그러한 우상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근본적인 여성과 남성'을 회복하도록 돕는습니다.


신이 계획한 세상이 이슬람에 의해 가려지는가요? 신이 계획한 성별이 성별 자기결정권으로 가려질 일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차별과 혐오입니다. 성별 자기결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창조 계획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보수성에 기인한 혐오 때문에 발생하기 쉽습니다.


[1]

다른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게 좀 더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양쪽 눈 색깔이 다른 오드아이는 유전자적 현상으로, 이는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원죄에 의해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 현상입니다.

오드아이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창조질서에서 벗어난 오드아이의 죄를 인식하고, 그런 죄인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 오드아이의 치유를 소망하며, 교회된 우리도 사랑으로 그의 치유를 소망한다”라고 말입니다.

오드아이인 사람이 그 자체로 자기에게 주어진 온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신이 계획하신 완전함과 창조질서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성별 자기결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맛있는 걸 고르듯 자기 성별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남성으로 정체화 하는 간성(intersex)도, 여성으로 정체화 하는 간성도, 제3의 성으로 정체화 하는 간성도, 자기 소견대로 선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각각의 정체화는 오히려 오드아이가 그 모습 그대로 온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그가 어떤 것으로 정체화를 하더라도 그것이 ‘남성’이나 ‘여성’에 혼동을 주지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 자기결정권을 포스트 모더니즘적 태도로 취급하는 것은 혐오에서 출발하는 생각이며, 차별의 사회이기에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포스트 모더니즘적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성별 자기결정권을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창조주를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성별 자기결졍권을 창조주의 계획 안에서 해석합니다.


전쟁 무기, 약탈, 성추행과 같이 존재하고 있으나 죄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별 자기결정권은 죄의 문제,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드아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질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간성과 마찬가지로 선택이나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혼동하는 것은 ‘창조질서’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혐오의 문화’ 때문입니다. 차별 안에서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가해를 인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혐오는 무섭습니다. 나에게 분리한 것에는 눈을 돌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논리 안에서만 있어도 됩니다.


[2]

그 반대로 창조질서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쉽게 용인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콘돔의 사용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이 창조한 것입니다.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창조질서에 맞서는 행위이지요. 그러나 그 앞에서 창조 디자인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걸 알지요.

콘돔의 사용이 창조디자인에 역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신약에서 남자의 긴머리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한 것처럼 문화적인 상황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각자의 신념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둘 중에 하나의 태도만이 창조질서를 따르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콘돔의 사례에서처럼 ‘창조질서의 절대성이 있다’는 것과, ‘창조질서에 관련된 문제 또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는 것이 서로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함께 가며 서로를 돕습니다. 오히려 이를 혼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차별과 혐오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천동설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해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동설과 관련된 성서의 온전한 해석은 오히려 성서학자들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동설이 사실에 부합하며 성경에서 해가 움직인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기존 성서학자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한 것이며, 진실을 가리는 잘못이 무엇인지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보수성과 혐오는 이를 진리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를 해체하려는 것으로 왜곡하고 자신이 옳다고 하는 완전한 논리와 사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목사나 교황도 잘못하고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제사장으로서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리더를 존중하고 그와 동행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목사가 성추행을 했다면 그가 더 이상 설교자로 설 수 없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도로서 동행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정죄와는 다릅니다. 제가 글을 쓴 의도 역시도 우는 자와 함께 울기 위함입니다. 고통과 신음을 만들어내는 진리로 위장된 거짓에 비명을 지릅니다. 그 자리에서 잘못이 무엇이었는지와 성서의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3]

흔히 가지게 되는 전제점이 있습니다. 시스젠더(육체와 정신의 성이 같음), 헤테로섹슈얼(이성애자) 여성이나 남성이면 창조 계획대로의 성정체성/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으로 오드아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창조 계획대로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성정체성과 성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사회문화적으로 시대에 따라 이상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에 대한 규정은 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남자의 긴 머리는 부끄러운 것이었지요. 그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이 창조 계획대로의 남자나 여자는 아닙니다.

이런 사실이 있다고 이상적인 지향점이 없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있으니 절대성은 없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그저 그들의 믿음이 그렇다고 하는 순환 오류일 뿐입니다. 창조 계획에 대한 믿음과 현실의 사실은 부딪히는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간성이 하나의 성별로 정체화하더라도, 몸이 바뀌어있는 트랜스 젠더가 어떤 성별로 정체화 하더라도, 그것이 창조 계획을 와해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사회문화적인 규정을 넘어서, 모든 완전하지 못한 몸을 초월하여, 창조 계획과 마주할 기회들이 생길 수 있겠지요.

다만 ‘나는 완전한데 너는 완전하지 않다’ 또는 ‘너를 인정하는 것은 질서가 없어지는 것이다’는 생각 모두 혐오에 기반한 사회문화에서 오는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다수의 성지향과 성정체성이 아닌 경우에는 그가 치료받아야 하는 질병 상황이라는 전제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창조 계획이라고 할 수 없는 또 다른 사례인 탈모를 생각해보면 어떤가 합니다. 우리는 탈모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창조 계획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압니다. 오히려 생활습관을 회복하는 것 이외에는 그 몸이 온전한 나의 몸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어떤 문제와 관련하여 갖게 되는 판단은 창조 계획을 따르는 절대적 기준 때문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가치판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소수자가 죄 된 행위와 관계되어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주의적으로 성경을 봐서는 안된다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십일조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구절이 있다고 성경이 십일조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십일조는 사회문화적 보수성이지 성경적 보수성이 아닙니다. 성소수자의 문제와 관련된 판단도 마찬가지 입니다(http://entolre.tistory.com/258 성경과 동성애).


사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간성과 같은 성소수자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오드아이나 탈모와 같은 문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앞에서 우리가 근본적인 성경의 빛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건, 성경을 보수적으로 보느냐 자유주의적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대신 내가 익숙한 사회문화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혐오가 이를 혼동하게 합니다. 혐오가 아닌 것을 오히려 자유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이게끔 눈을 가립니다.


[5]

사회문화가 만든 성역할 고정관념이 오히려 남성과 여성을 통한 창조 디자인을 가려왔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으로 창조 계획을 대체해 왔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일들이 사회를 와해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사회로 이끌어 오고 있는 것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진실이 사회문화적 성역할 고정관념을 넘어 진정한 성역할의 사회로 이끌고 있습니다. 

단지 진실을 통해서, 자유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유주의적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며, 창조 계획을 믿고 있는 사람은 창조 계획대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혐오의 사회문화는 이것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진보라고 하는 세력 중에서도 여성혐오의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여성 혐오에 참여하면서도 그건 오해라며 자기들이 판단하고 억울해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에 대한 보수성과 사회문화적 보수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념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하고 본인들이 익숙한 사회문화적 이념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현장과 실제에서 떨어져 있을수록 진실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판단을 할 위험성이 더 커집니다.

성소수자와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도 그것이 진실이기에, 절대적인 창조 계획을 와해시킨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창조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지키고 있는 사회문화적 보수성을 절대적인 창조 계획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도록 오해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6]

차별과 혐오에서 진실로 가는 과정은 절대 훈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투 운동이 옳은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고는 있지만, 그 과정 중에 모두가 고통을 함께 지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억울한 한 사람의 고통이 그 마을로 나눠지고 있는 과정이며, 결국 전체의 고통도 줄어들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번에 성별 자기결정권을 포스트모더니즘 사고이며 선택의 문제로 취급하는 발언을 보면서, 침묵은 가해이며 저도 같은 집단에 속해있는 가해자임을 실감합니다. ‘쉽지 않다’는 말로 자기 자리에서의 고민하는 고통 정도로만 미뤄둘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동조합니다. 그러나 혼란에 의한 그런 고통은 자기 권력을 쥐고 있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고통입니다. 이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들로부터 받는 고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고통이 해결되어 가는 것도, 억울한 사람의 고통을 함께할 때 가능합니다.


이를 죄책감으로 연결시켜 도망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더러운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죽였던 사울과 다름없습니다. 타인의 목숨도 빼앗는데 동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우리를 바울로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며 오직 은혜입니다. 내 고통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주고 있는 고통을 변명할 수 없게 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억울한 이들의 눈물과 함께 하며, 풍랑 속에서 배를 벗어나 주님이 계신 바다 위를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평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혐오와 이상적 세계  (0) 2018.04.07
동성애와 에이즈의 관계에 대한 진실  (5) 2018.03.19
호모포비아와 평화의 자리  (0) 2018.02.25
현장 신학  (0) 2018.02.21
성노동의 세상을 기다리며  (0) 2018.02.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