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엔 혼백(魂魄)이 존재한다. 혼(魂)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간다.
공장식 축산에서는 생명들이 물건으로 취급되며 고통당한다. 이것이 백(魄)이 당하는 고통이다. 품종개량이라는 이름 아래 원하지도 않는 기형으로 탄생한다. 그리고 삶이 아니라 끔찍한 생산과정이 부과된다. 죽음까지도 잔인하게 이뤄지며, 그 시체마저도 존중받지 못하고 자본논리와 탐욕에 의해 찢겨진다. 찢겨진 백(魄)은 귀(鬼)가 된다. 귀(鬼)로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백(魄)도 함께 찢긴다. 그렇기에 동물권을 민감하게 볼 줄 아는 이들은 일종의 샤먼이라 할 수 있다.
공장식 축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백(魄)의 영역에 대해서만 다루곤 한다. 그러나 이는 반쪽이다. 혼(魄)의 영역도 함께 다뤄져야 한다.
혼(魄)은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 의해 세워져서 존재하게 되는 거대한 하나, 하나 된 영의 우리, ‘큰 나’다. 그는 키워지고 죽임당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고통의 생을 견디고 비로소 나를 위해 죽음에 오른 ‘큰 나’다. 우리는 우리의 비통과 죽음을 먹는다. 그를 통해서만 나는 우리가 되었다. 나의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고 그의 죽음이 먼저다. 혼(魄)의 세계에서 시체는 없고 경외가 거기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혼(魄)의 나는 비로소 이 ‘큰 나’를 괴롭히는 것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되며, 고통에 동참하게 된다.
백(魄)의 영역만 있다면 자기 정의가 되기 쉽다. 그 끝은 나치즘이다. 그러나 혼(魄)의 영역만 있다면 위선이며, 악취가 난다. 백(魄)은 혼(魄)에 의해 돌이키며, 혼(魄)은 백(魄)에 의해 비로소 이 땅에 도래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거나 없다.
모든 일은 공장식 축산과 같다. 우리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혼백(魂魄)의 이중 관점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