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적 생명체로 보는 가설이다.
이와 같이 인류 선에 대해서도 그것을 유기체적인 총체를 이룬 하나의 인격처럼 생각해볼 수 있다.
(2)
A라는 사람의 도덕성이 7점, 실천이 8점이라고 하자. 그리고 B는 도덕성이 6점, 실천이 4점이라고 하자.
인류 선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가진 현재의 수준이 인류 선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류 선과 교감한 만큼이 그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A는 원래 타고나기로 도덕성 6, 실천 7이었는데 인류 선에 반응하여 +1씩이 되었고, B는 도덕성 4, 실천 2였는데 +2씩이 되었다(인류 선은 어떤 하나의 영역에서 특출나게 성장하게 하지 않는다. 대체로 균형있게 성장하게 한다. 어느 누구에게 특출난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냥 그가 그렇게 난 것일 뿐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인류 선에 대하여 더 수준이 높은 것은 A가 아니라 B다.
개인이 어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실천으로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총체인 인류 선 스스로가 선을 이루는 주체다.
물론 A는 더 많은 개인의 성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인류 선이라는 유기체적인 총체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는 선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는 B의 역할이 더 많다.
인류 선과의 교감에 있어 A는 B에게 겸허히 배워가야 한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적 생명체로 보는 가설이다.
이와 같이 인류 선에 대해서도 그것을 유기체적인 총체를 이룬 하나의 인격처럼 생각해볼 수 있다.
(2)
A라는 사람의 도덕성이 7점, 실천이 8점이라고 하자. 그리고 B는 도덕성이 6점, 실천이 4점이라고 하자.
인류 선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가진 현재의 수준이 인류 선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류 선과 교감한 만큼이 그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A는 원래 타고나기로 도덕성 6, 실천 7이었는데 인류 선에 반응하여 +1씩이 되었고, B는 도덕성 4, 실천 2였는데 +2씩이 되었다(인류 선은 어떤 하나의 영역에서 특출나게 성장하게 하지 않는다. 대체로 균형있게 성장하게 한다. 어느 누구에게 특출난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냥 그가 그렇게 난 것일 뿐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인류 선에 대하여 더 수준이 높은 것은 A가 아니라 B다.
개인이 어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실천으로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총체인 인류 선 스스로가 선을 이루는 주체다.
물론 A는 더 많은 개인의 성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인류 선이라는 유기체적인 총체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는 선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는 B의 역할이 더 많다.
인류 선과의 교감에 있어 A는 B에게 겸허히 배워가야 한다.
(3)
그렇다면 그가 인류 선에 반응한 정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절대 현재 그의 수준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적인 그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에게 원래 주어졌던 것을 이해한 후에야 그가 가지고 있는 인류 선과의 교감을 이해할 수 있다.
내 기준을 두고 그의 수준이 떨어진다거나 높다고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류 선과의 교감으로 그 사람이 재평가 된다.
사람은 판단의 대상이 아닌 섬세하게 이해할 대상이다.
(4)
인류 선과의 교감이 적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는가.
그의 못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만난 인류 선을 흘려보낸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선이 하는 일이다.
그가 바뀌도록 내가 조작하는 것도 아니며, 그가 바뀌지 않는 것도 내 책임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나의 판단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무조건 적인 손해를 보라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나를 죽이는 또 하나의 악이다. 해야한다면 싸우기도 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나의 능력에서 나온 것인지 인류 선을 통해 얻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흘려보내야 할 것은 오로지 인류 선에 의한 열매들이다.
내가 인류 선을 알고 있다고 그것을 아는 일이 마치 대단히 중요한 것 마냥 할 필요도 없다. 인류 선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아도, 인류 선을 흘려받은 사람은 이미 이해한다.
(5)
인류 선은 유기체적 총체다. 나는 혼자 존재하는 세포가 아니다. 단절된 세포에게는 생명이 없다.
인류 선은 머릿 속에 그려지는 개념 같은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우리가 모여 있는 육체 그 자체다.
따라서 연결되고 공급받지 않으면, 애초에 지금 당장 내 것이 있다고 흘려보내는 일도 옳지 않다.
반면에 흘려보내고 있지 않다면 사실은 죽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흘려보내는 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가장 먼저 고민할 일은 내가 공급받는 곳이 어딘가이다.
밥을 먹으면 알아서 힘이 나듯이, 인류 선을 공급받으면 인류 선 자체가 어떻게 흘러나갈 지 이미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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