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적 배제는 마치 늑대가 없는 옐로우스톤 처럼 자연스럽게 부자연스러운 죽음의 땅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문화라는 행동학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종이다. 아이히만과 같이 그것이 얼마나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그러나 엘크를 규정하는 것은 늑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인간이 쉽게 위계적 배제의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고해서 인간이 그렇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구조적인 것일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범고래가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모든 범고래의 특질인가? 인간도 약자를 괴롭히는 일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그런 개인이 나타나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이 인간종을 구성하는 구조가 되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구조가 되도록 하려한다. 인간도 그럴텐데, 범고래들의 문화에서는 그러지 않을거라는 확신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건 사실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일종의 신앙이다. 위계적 배제에 의한 종차별적 문화일 뿐이다.

다른 한편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녔다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 또한 위계적 배제다.
모든 존재가 생명 경외 속에 있다는 것은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종다움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 경외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곤충과 같은 존재들, 식물들이 가진 생명 경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생명경외는 인간의 숭고한 감정이 아니라 더 깊고 비밀 스러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인간 밖에 있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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