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 사람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인 걸 말하려고 한 거라 글만 캡쳐합니다.

1. 설득의 문제가 아닌 것을 설득의 문제로 만드는 게 혐오입니다.
2. 함께 투쟁해서 동지가 되는 거지, 울타리가 '되어주는' 곧 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건 시혜와 위계입니다.
3. 다수가 무엇을 바꿔 주었는지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무엇을 침해 당하는 지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4. 다수가 그 위계를 쉽게 버릴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엇을 바꿔줄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아직도 못바꾸는 지를, 곧 자신의 권력과 폭력성부터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5. 소수가 무엇을 침해 당하는지가 중심에 있지 않으면, 당장 눈 앞의 이슈만 해결하면서 또 다른 다름, 인종이나 국적, 빈곤 같은, 다른 소수자 억압을 방관하거나 강화합니다.

우선 함께 싸운 다음에, 그 다음에 착하게 설득해도 되지 않나요?
소수자 혐오가 사람을 죽였다고 주변에 알리고,
소수자를 고쳐야할 질병으로 보게 하는 게 혐오라고 먼저 말한 다음에,
그러고나서 착하게 설득해야 하는 것이 위계를 극복하는 연대일 것입니다.
그것 없이 눈 앞의 문제만 잠재운다고 해서 해결될 건 없어요. 내가 편하기만 해지겠죠.
단순한 의견 차이 정도의 갈등으로 대화할 수 있는 건 캡쳐한 글과 같은 입장이 아닐까 합니다. 그럴 땐 자기가 무엇을 해주는 지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우선 아래에 프로필 사진으로 하기 좋은 이미지들을 모아봤습니다.
카톡 같은 sns에 사진을 바꿔보면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서운가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옆 어딘가에선 죽음도 알려지지 않게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게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함께 바꿔갈 수 있다는 건지, 정말 진지하게 바꾸고자 하는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권력의 안전함을 주체로 두는 것이 아니라 침해당하는 소수의 주체성에 연대하는 말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혼내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고 느껴지시면, 혹시 캡쳐한 글과 같은 태도로 생각하고 계셨던 건 아닌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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