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이거나 비열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타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타성은 단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한 조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자기 경계 밖을 향하게 하는 이타성을 말한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타성이 옳다는 문제다.
이타적이지 않은 것, 혹은 이타성이 비교 하위에 있는 것이 그른 것이 아니다. 그냥 이타성이 옳다는 판단만 존재한다.
한 개인이 가진 이기심이나 비열함은 그러한 판단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아름다움과 같은 미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 거기엔 옳고 그름이 없으며, 아름다움이 추함이기도, 추함이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어떤 한 사람의 특징은 그의 유전자적인 본질에 닿아있는 그만의 화풍 같은 것이다.
이기심의 판단이 가능해 지는 것은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 사회 내에 실재하는 이기심의 종체에 대해 나의 이타심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것 만이 판단 가능의 영역에 있다.
한 개인의 이타성이 부딪히는 현장이 바로 사회의 총체적인 이기심과의 전쟁 현장이다.
현장에서의 현현이 없는 이타심을 우리는 위선이라 부르지 이타심이라 부르지 않는다. 현현없는 이타심은 존재 불가능하다.
이타심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그것은 그 타인이 변화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좋은 일을 한 것이라는 정신승리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엔 열매가 있다. 바로 사회 총제적인 이기심에 대한 투쟁으로 이타심이 이기심을 물러나게 하는 성과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도 그 사회에 실재하는 이기심의 총체와 이타심의 총체의 비율 자체가 판단의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 내의 이기심과 이타심의 비율과 마찬 가지로,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둘 사이의 비율은 그 사회의 색체인 것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개인의 이타성만이 판단의 대상이다. 무엇이 그른가가 아닌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다. 또한 실재하는 이기심의 총체와 싸우고 있을 때만 판단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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