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정권때를 비유해보자.
그때는 말 하나도 조심해야 하는 시기였다.
밤 낚시터에서 옆에 앉았던 사람은 경제발전은 좋은데 숨쉬며 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 말도 조심해야 하는 시대였지만, 그는 낚시에는 도가 튼데다 조금 허술해도 성격이 좋아 하룻밤 말상대로 금새 친해졌다. 영 입질이 없었는데 그가 잡은 고기로 매운탕을 해서 함께 반주를 하며 대화를 나누니 나도 정말 숨통이 트였다.
그런데 소주 두 세잔에 난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남영동이었다. 그는 나를 고문했다. 난 평생을 후유증으로 신장투석을 해야 했고, 심각한 정신병을 안고 살게 됐다. 나와보니 부모님은 충격에 쓰러져서 심각한 치매 상태가 되었다. 집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날 잡아넣고 고문했던 그는 지금 국회의원으로 잘 살고 있다.

비유 속의 나는 조심하지 않은 게 아니라 운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조신하게 집에 있었어야지 어디 줄도 없는 사람이 밤낚시를 갔냐고 하지 않는다.
지금은 남자들 사이에 그런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으로 패싱되는 몸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정도의 일을 당하며, 법적으로도 가해의 예방보다는 피해자의 피해가 어쩔 수 없다고 되어 있는 세상이다.

강간문화라는 말이 폭력적인가? 그런 시대의 폭력이 제대로 의식되지도 않고, 또한 철저히 차별적인 상황인 것이 진짜 끔찍한 폭력상태다.
메갈이라며 사냥당하며 성별 대립을 조장한다는 혐의를 받았던 이들이 없었다면, 승리, 정준영에 대해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이것이 정치 상황을 숨기기 위한 음모론과,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시선만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이게 정치 상황을 숨기려고 터뜨린 거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만큼 이 일이 얼마나 추악한 일인지가 이제는 드러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전히 가해자에 감정 이입이 가능한 것 역시, 원래 남자가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잠정적 가해자로 교육 받은 거라는 반증이다. 굳이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이 될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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