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들어 '수취인불명'의 가사 문제는 DJ DOC 개인의 도덕성 문제나 몇 개 가사의 미묘한 해석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얽혀있는 사회구조적 문제다.
이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나 단어 몇 개의 해석 문제로 읽는다면, 아마도 문제의 발생원인이 무엇인지를 놓칠 확률이 높다.
사회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는 자기 자신이 사회구조적인 차별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계층임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들은 마치 '노예는 같은 인간이 아닌데, 왜 나를 비도덕적이라고 하느냐'는 반문과 유사하다.
노예제는 사회구조적 차별문제다. 그러나 노예제가 상식인 곳에서는 노예제를 누리는 어떤 개인이 사회적으로는 도덕적이고 훌륭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런 사럼들은 노예제의 문제를 단순히 노예들을 너무 심하게 대하는 일부 주인들 개인의 문제로 인식한다. 오히려 노예제를 지적하는 이들이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일 때가 많다고 지적하곤 한다.

"먹고 살 것 없고 미개한 노예들을 먹여살리고 보호해 주는 것이 누구인가? 또한 이 제도를 통해 사회가 건강해지며 노예들을 포함하는 모두가 그 안전과 풍요를 누린다.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라 진정 사람들과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이성적 판단이 절실하다."

사회구조적인 차별을 누리는 이들은, 그 사회 안에서 그 문제를 인식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히려 그 안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왜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으로 보이는 주장을 하는 지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들은 쉽게 자신은 온전한 정신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으므로 나와 다른 판단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단정짓곤 한다. '그들이 원래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에(혹은 여성들의 성향이 그러하기 때문에)'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올바로 계도해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기 믿음과는 달리 그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성적이고 정의로웠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차별을 누리던 계층이었을 확률이 높다.
거기서 시작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게 되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근원부터 돌아보면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사실은 노예제와 같은 것이었음을 깨달아 갈 수 있다.

우리가 노예제라는 사회구조 위에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 구조를 스스로는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건, 보기에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비명을 듣고도 마음이 굳어 있는, 차별의 구조 위에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죄가 무죄인 것은 아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해도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사실 차별의 문제들은 정말 그렇게까지 인지하지 못할 일들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 몰이해는 더욱 잔인한 일이 된다.

잔인할 수 있고, 무지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울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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