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에서 동성애로, 다시 동성애에서 이성애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다. 플루이드 섹슈얼(fluid sexual, 살면서 성지향이 한번 이상 바뀌는 경우)이거나 호모플렉서블(homoflexible, 대체로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경우) 또는 헤테로플렉서블(heteroflexible, 대체로 이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경우) 등의 경우가 있다.
주변의 누군가 탈동성애라는 말을 쓰면, 플루이드 섹슈얼인지, 호모플렉서블인지, 헤테로플렉서블인지를 구분해 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 탈동성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본연의 정체성을 뒤틀어버려 스스로 영혼을 갉아먹게 하는 일이 된다.
주변의 누군가 탈동성애라는 말을 쓰면, 플루이드 섹슈얼인지, 호모플렉서블인지, 헤테로플렉서블인지를 구분해 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 탈동성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본연의 정체성을 뒤틀어버려 스스로 영혼을 갉아먹게 하는 일이 된다.
양성이 나눠진 동물 들 중에서는 동성 간 성관계의 모습이 각 종마다 무리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동성애유전자가 발견된 적은 없다. 반면에 강한 동성애 혐오 사회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자란 건강한 사람에게서 성소수자의 성지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후천적인 영향이 있다면, 동성애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인의 성지향을 스스로 속이고 왜곡하는 것이다.
만약에 성지향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가정해보자. 이 사회는 <선택가능하다=이성애가 맞다>는 공식이 딱 봐도 오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은연중에 선택이 가능하다면 이성애가 맞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혐오구조다.
여기서 탈동성애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회적 혐오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배우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지 않을 때 스스로를 부정하고 왜곡시킨다. 올바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건강하게 자기 성지향을 정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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