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자 좋아하는데 무슨 여성혐오냐?"

이와 반대의 편에 서있는 같은 식의 오류가 있습니다.


"난 동성 간의 연예 모습을 보면 혐오감이 느껴져. 인정은 하지만 내게 동성애 혐오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거부감이 드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건강한 성지향입니다.

동성애자가 동성에게 끌리거나, 무성애자가 끌림이 없는 것이 그들의 건강한 성지향인 것과 동일합니다.

동성애 혐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는 치유가 가능하다거나, 에이즈가 많아지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같이, 이미 아닌 것이 밝혀졌음에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바로 동성애 혐오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동성 간의 연애에 대한 혐오감은 건강한 것이니 괜찮을까요?


(1) 혐오감을 가지는 나라는 존재는 괜찮습니다.

(2) 타인에게 혐오감을 가지는 것은 괜찮지 않습니다.


공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만, 둘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미움을 가지는 나라는 존재는 괜찮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드는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미운 감정을 가지는 것은 괜찮지 않습니다. 나쁜 일에 대해 나쁘다고 하는 것과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예시를 들어보지요.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괜찮습니다. 자살이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괜찮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단순히 나약해서, 잘못된 존재라서 그가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닌 것입니다. 자살 욕구가 있더라도 그는 온전한 존재입니다. 자살 욕구가 제거되어야 그가 온전한 게 아닙니다.


성소수자에 대해 느껴지는 혐오감은 병원균에 대한 혐오와 다른 것입니다. 상대방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반면 그 혐오감은 단순히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래서 이는 미움의 감정과 같이 가치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미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타인을 미워하는 것에 당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미움을 가질 수도 있는 나라는 존재가 괜찮은 것입니다. 미움의 감정이 드는 것은 나에게 건강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미움이 괜찮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이 괜찮은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입니다.


혐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성 간의 연애에 혐오감을 가지는 나라는 존재는 괜찮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해도 됩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혐오 자체는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이나 자살욕구 처럼 지금 내게 어쩔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미움이나 자살 욕구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을 모두 받는 것 처럼, 동성 간의 연애에 대한 혐오감도 그 둘의 영향을 받습니다.

선천적으로 미움이 쉽게 일어나는 사람, 후천적으로 미움이 쉽게 일어나게 되는 환경에 있게 된 사람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살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혐오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지만 당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라도 미안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쉽게 미움이 일어나는 사람에게 미움에 대한 죄의식을 주면 미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미움이 있는 존재 자체를 감싸줄 때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살이 죄라는 죄의식이 아니라, 그가 잘못된 게 아님을 말해주고 안아줄 때, 그가 그 자신의 힘으로 자살을 이겨냅니다.

미움, 자살, 억울한 일일 수 있습니다. 더 억울할 수록 감싸주어야 합니다.


혐오는 잘못된 거 맞습니다.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할 수록 더더욱 그를 감싸주는 것이 후천적으로 혐오를 이길 힘을 줄 것입니다. 물론 그가 혐오에 당당하지 않을 때, 그를 감싸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혐오감이 드는 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혐오감에 자기 자신을 담가 놓지 말고, 자신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감싸주는 일은 억울함이 큰 만큼 더 커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동성 간 연애에 대해 혐오감이 듭니다.

그런데 앞에 동성애 혐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성소수자가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그의 억울함에 비할바는 못됩니다.

여기서 신비가 발현됩니다. 나도 억울하지만, 내 앞에 더 억울한 사람을 위해 나를 내려놓고 그를 감싸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내 억울함마저 극복되고 나도 감싸안아집니다.

바로 그것이 감싸주는 일의 본성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 입니다. 미움을 가지는 나라는 존재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억울한 그 앞에서 나의 미움을 잠시 내려놓고 그를 감싸줄 때, 놀랍게도 내가 미움을 잠시 억지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진정 위로를 받습니다.


혐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고, 당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후천적으로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여주세요.

또한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것은, 눈 앞의 억울함에 함께 동참하는 일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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