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험을 해보자.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동일한 생산을 하는 A와 B가 있다.
B의 월급 중에 50만원을 빼서, A의 월급에 더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계속 지속한다.
그 시스템 속에서 B는 억울한 감정을 갖게 된다.
거기서 A가 갖게 되는 감정은 놀랍게도 B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식이다.
[2]
이러한 부당함을 해결하자 할 때 종종 걸고 넘어지는 게 악의적인 시스템이다.
"내가 빼앗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말고 힘을 합쳐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빼앗기는 사람과 이득보는 사람은 있는데, 시스템은 실체가 없다. 본질적으로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당함의 유지에 대해, A는 언제나 B에게 분열의 책임을 묻는다.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더 얻는 사람이 빼앗긴 사람에게 돌려주면 된다.
그냥 돌려주어라. 부당함 만큼 계좌이체를 하라. 실체가 먼저 행하는 곳에서만 실체가 있는 결과가 따라온다. 그때에야 시스템은 흥미를 잃고 힘을 잃는다.
[3]
A가 B에게 50만원씩을 돌려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A가 받게 되는 것은, 오히려 더 솔직해진 B의 증오심이다.
이는 당연하다. 이제 A는 자기가 받은 50만원을 돌려주면서 공평하다하는데, 그동안 불공평하게 쌓인 월급이 5천만원이었던 것이다!
A가 더 받겠다고 한 것이 아닌데, A의 탓이라고 하니 언뜻 A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노는 피값이라 쉽게 드러나지만, 마치 공기같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A가 가진 우월감이다.
결국 자기가 베푸는 주체라는 걸 숨을 쉬듯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A가 가진 것이 우월감이 아니었다면, B의 분노에 더 가슴아파 하며 50만원이 아니라 거기에 50을 더해 100만원씩 돌려주기 시작한다.
만약 A가 가진 것이 우월감이 아니었다면, 추가의 50을 주려는 A에게 B는 오히려 살림살이 다 아는데 25만 주라고 할 것이다.
[4]
그러한 돌려주기는 부당한 5천만원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될까?
아니다. A가 주는 것이 우월함이 아니었다면, B는 2천 5백에서, 혹은 그 이하에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깊은 우정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람이다!
악의는 사람을 뒤흔들지만, 사람은 이미 악의를 이겼다.
악의가 흔드는 그것보다 더 크게, 사람으로, 이미 이겼다.
바로 그것이 사람이다.
[5]
혐오와 차별의식은 마치 제 살 같아서 자신이 그런 상태인지 쉽게 알수는 없다. 어쩌면 자기 안의 사람이 아닌, 그 살덩이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믿으면 다르다.
부당한 5천을 2천 5백도 안되게 극복할 수 있는,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바로 그 '사람'을 바라보면 다르다.
이해할 수 없이, 분노하고, 증오를 품고, 변명하고, 무능한 상대가 있다.
그가 가진 그 살덩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내 안에 있는 동등한 사람을 보는 것이다.
그때에,
그의 비명은, 변명은, 무능함은, 그 크기만큼 아픔으로 나를 쑤신다.
내가 혐오가 무엇인지, 차별의식이 무엇인지, 악의적인 시스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충분하다.
사람이 이미 이겼듯, 그 안의 사람과 내 안은 사람은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며 이미 모두가 눈물 흘리고 있다.
아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람이 바꾸는 것이며, 사람이 한다.
실험을 해보자.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동일한 생산을 하는 A와 B가 있다.
B의 월급 중에 50만원을 빼서, A의 월급에 더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계속 지속한다.
그 시스템 속에서 B는 억울한 감정을 갖게 된다.
거기서 A가 갖게 되는 감정은 놀랍게도 B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식이다.
[2]
이러한 부당함을 해결하자 할 때 종종 걸고 넘어지는 게 악의적인 시스템이다.
"내가 빼앗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말고 힘을 합쳐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빼앗기는 사람과 이득보는 사람은 있는데, 시스템은 실체가 없다. 본질적으로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당함의 유지에 대해, A는 언제나 B에게 분열의 책임을 묻는다.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더 얻는 사람이 빼앗긴 사람에게 돌려주면 된다.
그냥 돌려주어라. 부당함 만큼 계좌이체를 하라. 실체가 먼저 행하는 곳에서만 실체가 있는 결과가 따라온다. 그때에야 시스템은 흥미를 잃고 힘을 잃는다.
[3]
A가 B에게 50만원씩을 돌려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A가 받게 되는 것은, 오히려 더 솔직해진 B의 증오심이다.
이는 당연하다. 이제 A는 자기가 받은 50만원을 돌려주면서 공평하다하는데, 그동안 불공평하게 쌓인 월급이 5천만원이었던 것이다!
A가 더 받겠다고 한 것이 아닌데, A의 탓이라고 하니 언뜻 A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노는 피값이라 쉽게 드러나지만, 마치 공기같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A가 가진 우월감이다.
결국 자기가 베푸는 주체라는 걸 숨을 쉬듯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A가 가진 것이 우월감이 아니었다면, B의 분노에 더 가슴아파 하며 50만원이 아니라 거기에 50을 더해 100만원씩 돌려주기 시작한다.
만약 A가 가진 것이 우월감이 아니었다면, 추가의 50을 주려는 A에게 B는 오히려 살림살이 다 아는데 25만 주라고 할 것이다.
[4]
그러한 돌려주기는 부당한 5천만원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될까?
아니다. A가 주는 것이 우월함이 아니었다면, B는 2천 5백에서, 혹은 그 이하에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깊은 우정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람이다!
악의는 사람을 뒤흔들지만, 사람은 이미 악의를 이겼다.
악의가 흔드는 그것보다 더 크게, 사람으로, 이미 이겼다.
바로 그것이 사람이다.
[5]
혐오와 차별의식은 마치 제 살 같아서 자신이 그런 상태인지 쉽게 알수는 없다. 어쩌면 자기 안의 사람이 아닌, 그 살덩이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믿으면 다르다.
부당한 5천을 2천 5백도 안되게 극복할 수 있는,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바로 그 '사람'을 바라보면 다르다.
이해할 수 없이, 분노하고, 증오를 품고, 변명하고, 무능한 상대가 있다.
그가 가진 그 살덩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내 안에 있는 동등한 사람을 보는 것이다.
그때에,
그의 비명은, 변명은, 무능함은, 그 크기만큼 아픔으로 나를 쑤신다.
내가 혐오가 무엇인지, 차별의식이 무엇인지, 악의적인 시스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충분하다.
사람이 이미 이겼듯, 그 안의 사람과 내 안은 사람은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며 이미 모두가 눈물 흘리고 있다.
아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람이 바꾸는 것이며, 사람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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