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주의는 개별의 자아인식과 다르다. 일종의 세계관이다. 종교다.
개별 존재의 본질은 분리 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다. 오히려 관계 안에서 개체는 고유성이 더욱 풍성해진다. 자아의 풍성함 역시 누릴 수 있게 된다.
반면 개체주의에서 인식하는 자아는 사실 고유한 자아가 아니다. 영원불멸의 배타성을 고유한 자아로 대체하여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개체주의의 분류 중 하나인데, 개체주의는 능력주의나 성과주의, 나르시시즘 등을 통해 세상에 구현된다.
개체주의는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모든 것을 개인이 소비하고 소유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때 개인은 진정한 한 개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 존재란 무엇인가. 한 개체의 자아는 끊임없는 배타성과 타자성의 중첩이다. 이 중첩은 정반합의 통합이 아니다. 반대다. 통합될 수 없음이며, 슬픔이고, 애도이다. 초월이다. 존재할 수 없는 바다다.
개체주의는 그러한 중첩을 가로막고 배타성을 위에 둘 수 있게 하는 신념이나 가치다. 배제적 통합을 이룬다.
개체로 표현 되지만 그 본질은 위계, 위력이다. 곧 가부장제나 전체주의가 오히려 개체주의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현대의 개인주의는 가부장제나 전체주의의 변주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현대적인 개인이라는 인식은, 곧 나라는 인식은, 자본이나 국가와 같은 배타적 위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백인남성처럼 국가나 자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 있을 뿐이다.
개체주의에서 생각하는 자아는 고유한 내가 아니라, 위계가 기본값이 되어 배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채로 인식해도 되는 나다. 고유한 내 가치관, 취향, 성격이 아니라 위계에 복속 되어 위계로서 존재 가능한 가치관, 취향, 성격이다.

바이러스와 같이 힘으로 계속 점령하고 짓밟는다. 개체주의의 피해자들은 또 다른 개체주의자로 변한다.
자신의 나음을 확인하며 자신은 더 나은 존재로, 상대는 열등하고 부족한 존재로 인식한다. 또는 회피하고 침묵하며 개체주의에 부역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개체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미 이 질문에서부터 함정이 있을 수 있다. 폭력 앞에서 어떻게 멀쩡한가? 짓밟힌 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오류는 퍼져나가고, 개체주의는 존재만으로 이미 점령했다.
그래서 오히려 극복할 수 없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짓밟힘과 죽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명의 시대가 저물어간다. 죽음이 소비되지 않는 곳에서만 삶도 소비되지 않는데, 이제 대멸종 가운데 모든 것들이 소비되어 간다. 대멸종되어 간다.

이 역시 이길 수 없다. 다만 사람은 무리 동물이다. 죽음을 향해가는, 곧 그 생명을 향해가는 방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개체주의는 내가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고 중첩되는 애도의 무리 동물로 다시 작게 모인다. 그 힘으로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중첩되어 간다. 다시 타자가 존재하게 된다. 타자는 불안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드디어 경외로서의 죽음이다. 그렇게 내가 아닌 우리의 생명을 살아간다. 이어간다. 죽음이 드디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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