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려하면 불안감이 급격히 올라간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방금도 버스를 눈 앞에서 놓치고서 자해를 하고 싶어지는 상태가 되어 몸이 굳는다거나 그렇다.

세상은 그런 내가 건강하지 않아서 치료가 필요한 거라고 쉽게 정리한다. 개인이 건강하지 않게 되는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질병인 개인의 능력을 정상성 속에서 자격화하여 그 문제를 가리는 것으로써 세상은 안정을 얻는다.
그렇게 누군가의 안정은 누군가를 내몰아 제물로 바친 결과다.

나는 능력을 인정받거나, 존재를 품어주는 것이 힘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앎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전에 힘이되는 말을 생각하고 나눌 일이 있었는데, 나에겐 그것이 "네 말이 맞아"였다.
그런데 내 삶은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는다. 크고 작게 언제나 나는 틀렸다.

틀리게 되는 생이 있다.
홈리스들, 장애인들에게 시설과 자활을 답으로 제시하는 이들은 모르는 생이 있다.
난민 등 제거된 자리에서는 불법으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성노동자도 자활이니 노르딕 모델이니 하는 게 답이 될 수 없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그런 영역이다. 그러니 언제나 세상의 답은 나를 제거해왔다. 우리를 제거해왔다.
그러니 거기에 살아가니 언제든 불안정해 질 수 있는 거다. 나쁘거나 아주 나쁘거나 그런 주기가 있다. 지금은 아주 나쁜 주기 중에서도 고약한 주기다.

나는 세상의 고통이다. 저주이다. 피와 고름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 생의 화육이다.
고통이 없어야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다. 어떤 세상인데.
구원은 없다. 오로지 거기에 구원이 있다. 구원이 있어서 힘을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구원이 없는 곳에서 드디어 모두가 여기에 있다.
나는 정신병자이다. 그래서 전혀 자랑스럽지 않다. 수치스럽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그래서 자랑스럽지 않다. 그래서...

다만 너무나 힘이 드니, 누군가가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게. 우리가 되게 하는 마음은 사실 그것이 아닐까. 아픔이 포기되지 않을 때, 해방으로 하나된다.
세상에는 전쟁이니 착취니 하는 것들이 가득하고 망가져있다. 나도 종종 망가진다. 연결되어 손을 잡아주기를 기도한다.
손을 잡아준다는 것은 단순히 자살이나 자해를 벗어나는 게 아니다. 다만 시련이 너무나 많으니 구해주기를, 뻔한 못됨에서 풀려나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프다. 그래서 세상, 곧 우리를 저주하고 욕을 한다. 우리(세상)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왜 버려졌는가. 우리를 욕하다가 어느새 우리가 된다. 언제나 우리(세상)는 너무너무 아프다. 아파서 못 울었고, 울지 못해 울고 있었다. 그 눈물없는 눈물, 그게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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